물들다. 15×20. 2020.
물들다. 15×20. 2020.

“책 읽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책 속 남의 인생이나 지식에 그다지 관심 없어요. 늘어놓은 현학적인 단어들이 어떤 때는 숨 막히게 지겨워요.”

책방주인 앞에서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뱉어내고 있었다. 책에서 읽은 그대로를 늘어대며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서 마치 분에 맞지 않는 명품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과 비슷한 허세를 느꼈을 때부터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책만을 읽어대는 사람들을 힘없는 미식가라 여겼다. 화려하게 글로 치장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어느 활동가를 떠올렸다. 그가 참 숨 막히게 싫었다. 책방주인은 그런 나를 바라보고 웃기만 했다. 

작년 이맘때쯤 지인들과 함께 간 식당에서 만난 남자는 책방주인이라 했고 진주문고를 얘기했다. 책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진주문고는 궁금했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책방을 진주 역사라고 했다. 하이틴로맨스나 여학생 잡지를 사러 간혹 드나들었던 여고생이 중년이 되어 책방주인과 차를 마시며 이렇게 앉아있으니, 강산이 몇 번째 바뀌고 있었는지를 머리보다 손가락이 먼저 세고 있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십대 후반 이십대 후반의 스쳐간 인연이 사십대 후반 오십대 후반 머리카락 반 서리를 맞은 세월에 만나고 보니 그 곳은 그 자리에서 역사가 되어 있었다.  

이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게 되었고, 5층 차방에서 내려지는 뜨거운 차를 마시려 달려가기도 하고 2층 여서재에 가까운 지식인들의 강연을 응원하고 동참도 하려 달려가기도 했다. 어디냐 물을 때 진주문고에 있다고 했으니 사람들은 내 서가에 책이 한없이 쌓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만나러 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1년이 지났을 즈음, 5층 차방으로 올라가는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 계단을 쳐다보며 올라가던 얼굴이 옆으로 돌려지기 시작한 때가 있었다. 참 오랜 시간이 걸려 바뀐 방향이라며 혼자서 웃었다. 계단을 올라가다 멈추어 밑을 바라보았을 때 풍경화와 같다고 여겨지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한참을 응시한 적이 있다. 서서 책장을 넘기는 사람과 고개 숙여 앉아 책을 넘기는 아이, 엄마와 함께 귓속말을 하며 눈빛을 나누는 어린 딸의 모습이 순간 정지화면처럼 멈춰지며 책 사이 그 사람들이 모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보다 더 평화로워 보였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분홍빛 앳된 얼굴이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넘기는 책장에서 평화로웠다. 아이의 책을 사러 온 듯 하는 젊은 여자는 시인의 시집을 넘기고 있었고, 양복차림의 중년남자 손에 쥔 두꺼운 책제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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