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打雙皮(일타쌍피). 20×15. 2020.
一打雙皮(일타쌍피). 20×15. 2020.

에베레스트 산을 트래킹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도시락과 물 조금 넣을 수 있는 배낭 하나 사야지 하는 마음으로 친구와 아웃도어 매장을 찾았다. 쇼핑을 좋아하는 친구를 데려가는 게 아니었다. 매장을 나올 때 내 몸은 온통 산악인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대신 매장을 지키던 젊은 아들은 장사에 소질이 있다 칭찬 들었을 것이고, 나는 당분간 예쁜 실크 원피스를 사 입을 수 없게 되었다. 

지리산 옛길을 ‘고마워요 지리산’ 표어를 들고 섰더니 단순히 만보기 한번 채워 보겠다고 따라나선 마음이 부끄러워져 버렸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일단은 걷는 것이니 꿩 먹고 알 먹고 아닌가! 일행들은 줄기와 이파리로 나무 이름을 외고 나는 내 손에서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 만보기 숫자를 왼다. 구불구불한 숲길에 떨어져 있는 낯익은 열매가 정겨웠고, 계곡 옆을 따라 걸어 시원한 물소리가 좋았다. 물가 넓은 바위에 앉아 도시락을 펼치기도 하고 계곡물에 몸을 던져 어릴 적을 소환한다. 어른들은 언제 적 물놀이가 마지막이었는지를 저마다 계산했다. 나는 이때 멈춰버린 내 만보기를 생각했다. 

걸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후 일상이 달라졌다. 틈만 나면 몸을 움직여 숫자를 올려댔고 그러면서 정신없는 이 움직임은 선비 짓이 아니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밤마다 친구들과 대화 방에서는 하루의 걸음 숫자들이 올라온다. 벌써 엿새째 친구들은 만보 이상의 숫자를 매일 올리고 있다. 선생들이 참 독하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들은 직원체육시간에 빛나는 주연들이었고 산책과 조깅으로 다져진 친구들이라 만보는 그저 일상과 다름없었다.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 친구 때문에 네 명의 친구들이 매일 밤마다 이 지루한 숫자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걸었더니 보였고 걸었더니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얼마 후에 가기로 한 달마고도 트래킹 지도를 펼쳐들며 만보기가 몇 바퀴를 돌 수 있을까를 계산하고, 나머지 걸음수를 다음날로 저장해 쓸 수 있었으면 하는 음흉한 상상을 한다.       

“만보걷기 저도 해볼까요?”   

“응, 매일매일 우리 커피쿠폰 쏘기로 해!”

“그렇게 좋은걸 혼자 하지 말고 같이 합시다”

“네, 매일매일 커피쿠폰 거는 겁니다.”

어차피 걷는 걸음이다. 일타쌍피(一打雙皮)하며 날로 먹는 기분이지만, 만보를 채우지 못할 적엔 난 이곳 저곳에서 출혈이 심할 게 분명하다. 그야말로 쌍코피 터지게 커피쿠폰을 이방 저 방으로 쏴대야 한다. 그래서 난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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