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시간이 흐를수록 허기진 배를 허겁지겁 나이로 채우며, 세월을 다그치듯 가속기를 밟아 앞만 보며 달려왔다는 회한이 듭니다. 그런 사실을 의식하고 체감하면서도 고착화된 습관은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스스로 엮은 자신의 족쇄를 끊거나 풀어야 조금은 새롭고 달라진 삶을 장착할 수 있겠지요. 놀 거리, 먹을거리, 볼거리, 다닐 거리, 읽을거리가 놀라움 그 이상으로 무궁무진한 풍요로운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의 몸과 머리에는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탐욕의 움이 계속 자라며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분도 있겠지만요. 상대적 만족감이나 박탈감을 가지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웃이나 주변을 돌아봅니다. 그들과 자신을 단순 사물로부터 복잡한 체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비교선 상에 놓고 대조하지요. 자신이 지닌 좋은 것, 누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대수롭지 않습니다. 본인에게 없는 것, 부족한 것들은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몸집이 되어 머리를 아프게 하고 가슴을 치게 합니다. 이게 문제겠지요. 

불행의 원인은 행복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진 행복을 느끼지 못하거나 모르는 데에 있음을 진지하고 겸허하게 고민해야겠습니다. 시 한 편을 소리 내어 읊조립니다.

코미디를 보다가 와락 운 적이 있다 / 늙은 코미디언이 맨땅에 드러누워 / 풍뎅이처럼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 그만 울음을 터트린 어린 날이 있었다 /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 아이가 코미디를 보고 운다고 …… / 그때 나는 세상에 큰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 웃음과 눈물 사이 /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 어두운 맨땅을 보았다 / 그것이 고독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 그런 미흡한 말로 표현되는 것을 알았을 때 / 나는 그 맨땅에다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 / 늙은 코미디언처럼 / 거꾸로 뒤집혀 버둥거리는 / 풍뎅이처럼   
- 문정희 「늙은 코미디언」

익살스러운 몸짓이나 대사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풍자나 웃음을 제공하는 이들을 가리켜 코미디언comedian, 희극 배우라 합니다. 연극이나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에서, 임기응변으로 관객을 웃기는 일이나 대본에 따라 익살스럽게 연기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사람을 개그맨gag man, 익살꾼이라 이릅니다. 우리나라 코미디언과 개그맨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사전 풀이에 의하면 풍자와 임기응변의 있고 없음이 도드라지게 다를 뿐 그 밖의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다만 두 용어가 풍기는 뉘앙스가 한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쓰일 수는 있겠다 싶었습니다. 

시를 읽는 내내 마음은 자꾸만 가라앉습니다. 단순히 웃고 떠들고 했던 지난 일들이 멋쩍게 살아나 폐부를 찌릅니다. 그들 앞에 선 저는 지금 ‘웃을 것인가, 울 것인가’라는 논제가 아닌 ‘울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난제에 부딪쳤습니다. 어쩌면 슬퍼서 더 웃고, 어쩌면 더 우스워서 눈물이 왕창 쏟아질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온몸이 먹먹하고 떨립니다.

세상에, 이런 무자비한 충격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가 코미디를 보고 울면서 세상의 큰 비밀을 알았다니요. 연기하는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삶 속에서 맨땅의 속살을 보았다니요. 거미줄에 걸려 퍼덕거리다 체념하고 마는 잠자리를 보듯, 어른들이 깔아 놓은 덫이 내뿜는 비장미悲壯美라고 할까요. 아, 꽤나 아픈 통찰입니다. 어디에도 거저 가져가는 웃음은 없습니다. 무심코 뜨는 밥 한 술에도 누군가의 땀과 희생이 철저히 녹아 있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그들이 겪는 진상眞相을 떠올리니, 예전에 날던 그 풍뎅이를 왜 지금은 볼 수 없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법도 합니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