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조 시인
정삼조 시인

두어 달 전쯤 서울 사는 향우(鄕友)에게서 전화가 왔다. 삼천포고등학교동창회재경지부에서 모교의 최송량 시인 시비(詩碑)를 건립하고자 하니 조언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최송량 선배께서 언제 작고하셨더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그분이라면 시비가 마땅히 있어야 하리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여러 사람과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시비의 시는 1992년 나온 최 선배 두 번째 시집 「왜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란 말인가」에 실린 ‘삼천포 아리랑(2)’이 좋으리라는 결론을 공유했다. 원 제목에서 ‘(2)’는 빼기로 했는데, 이와 같은 제목으로 이 시가 전라도 장흥에 있다는 어느 문학공원에 시비로 서 있다고 한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봄이 오는 한려수도/ 뱃길 삼백리// 동백꽃 피는 사연/ 곳곳에 서려// 겨울 지나 봄이 오면/ 사랑이 피는/ 사랑섬 건너 오는 새파란 바다// 갈매기 두세마리/ 한가히 나는// 노산 끝 신수도엔/ 노래미가 한창인데// 와룡산 숨어 피는/ 진달래 꽃은// 피를 토해 붉게 피는 수채화 한 폭”

봄이 오는 우리 지역을 자연스럽고도 절묘하게 노래한 시인데, 어느 계절에 읽더라도 봄이 우리 곁에 머무르는 것 같지 않을까. 지금의 이 코로나 난리가 물러가고 나면 연이어 최송량 시비가 우리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최 선배는 1940년에 출생하여 2015년에 작고하셨다. 부산대학교에 다니다가 도중에 그만두셨다고 했다. 이후 쭉 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 큰 벼슬을 않으시고 퇴직하셨다. 197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셨고, 술을 즐겨 아마도 그 때문에 위 수술도 몇 차례 겪으셨는데, 가까이 있던 사람들과 인근 글 쓰는 사람치고 이 선배에게 술빚 없는 사람 별로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최 선배는 시집 여섯 권을 남기셨다.

이 최 선배보다 한참 더 선배가 되는 우리 지역 문인으로는 우보 박남조 시인이 있다. 아호인 우보는 소 우, 걸음 보 우보(牛步)인데, 아마도 평생을 자기 뜻대로 천천히 사신 분이 아닌가 싶다. 1909년에 나셨고 풍문에 작고하셨다는 소식만 얼핏 들었을 뿐, 삶의 방편을 좇아 노년에 김해 어딘가로 옮겨간 뒤로 소식을 모르니 안타까울 뿐이다. 우보 선생은 우리 지역 남양동에서 출생하셔서 진주와 우리 지역 신수도에서 한학을 하시다가 진주의 보통학교를 거쳐 경남사범 3년에서 퇴학당하셨다. 퇴학의 이유는 항일단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었으니 선생의 기개를 짐작할 만하다. 이후 선생께서는 지인의 소개로 우리 지역 신수도에서 ‘보명학회’를 설립하여 13년간 문맹퇴치와 자력갱생 사업에 매진하셨다. 삼십 중반 무렵부터 삼천포에 사셨으나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셨다. 

선생은 193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젊은 개척자’가 입선되어 문인으로의 길을 걷게 되셨다. 이후 삼천포 지역의 문학에는 알게 모르게 선생의 체취가 묻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선생은 1979년 시조집 「바닷가에 살면서」를 상재하셨고 1985년에는 삼천포 지역의 민요를 손수 채집한 「내 고향(故鄕) 민요(民謠)」를 발간하셨다. 이다음 시비가 건립된다면 선생의 시비가 당연하리라 생각한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