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20×15. 2020.
어쩌면. 20×15. 2020.

길이 곧게 뚫려 있으면 속이 시원하잖아. 거긴 땅값도 제법 높아. 사람들은 곧은 길을 좋아하지. 그래서 여기저기 곧고 큰길을 내주길 바라는 거야. 근데 말이야 내가 내몽골 초원을 자동차로 달린 적이 있어. 미국서부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길... 소실점을 향해 끝없이 곧은 길을 달렸지. 지평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그 초원을 달리면서 처음에는 무척 경이로워 환호성을 질러댔지. 글쎄 점점 지루해 버리지 뭐야. 언제 닿을지 모르는 저 끝을 향해 달리고 달려도 항상 그 자리였거든. 그때 난 푸른 화면만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감상하고 말았어.

곧은 길을 달린 이후 난 굽은 길을 사랑하게 되었다. 돌고 돌아 휘어진 길이 옴니버스 영화 같아 좋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수양버들 늘어진 저수지가 나오고, 또다시 모퉁이를 돌아서면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꽃이 보였다. 운이 좋으면 할미꽃이 고개 숙인 양지바른 언덕도 나온다. 돌아서면 빛바랜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도 보였다. 주인공이 계속 바뀌는 굽은 그 길이 나는 좋았다. 

순간 굽은 길은 참 모호하다고 여겼다. 돌아서면 그 길이 알 길 없어 조금 두렵기도 했고, 휘어져 돌아 나오는 그 길이 정겹기도 했다. 저 길을 돌아섰을 때 새로운 기대감에 불안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또 흥분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모험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굽은 길을 돌면서 조금씩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심심치 않게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인생에서 계획대로 살아내는 사람은 아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우연이라는 것이 내 인생을 더 많이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굽은 길이 우연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의 집 창으로 바라보이는 곳에는 돌아 들어오는 굽은 길이 있다. 큰 소나무가 서 있는 그 길을 나는 ‘어쩌면 길’이라 이름 붙여 주었다. 어쩌면, 저 아래 아파트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가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자전거를 타고 비틀비틀 핸들을 흔들어대며 굽은 저 길을 들어서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그리운 사람이 꽃다발 한 아름 안고서 살며시 걸어오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낯선 사람이 한 번도 와 보지 않았을 새로운 길에 들어서면서 조심스럽게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굽은 길은 희망을 주기도 하고 다가올 낯설음에 기대를 주기도 한다. 나의 ‘어쩌면 길’은 소원을 빌고 있는 정화수 같은 그런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어쩌면... 그래 어쩌면 굽은 길은 오롯이 나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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