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괄약근 푼 똥꼬는 새집 같았다 // 비닐장갑 낀 둘째손가락으로 살살 똥을 주웠다 // 오목한 새집에서 알이 굴러 나왔다 // 손바닥에 안기는 까만 어머니는 작고 귀여웠다 // 낡아 허물어질 때마다 보수 기회를 놓친 몸에서 // 똥은 칠십구 년이나 잘 살다 갔다” - 권선희 〈숙주(宿住)〉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말하는 이는 참으로 의연합니다. 큰일이 아닌 듯 놀랍고 신기할 정도로 담담합니다. 음미할수록 차분하게 드러나는 용기가 닭살을 돋게 합니다. 눈물을 눈물로써 흘리지 않으며 슬픔을 슬픔으로써 소리 내지 않습니다. 어머니, 당신께서는 제 아픈 몸 제대로 한번 추스르지 못하고 칠십구 년을 살다가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삶을 갈무리했다는 얘깁니다. 곡절도 많고 사연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생生의 시간은 때론 굵고 때론 가늘면서 긴 길이만큼이나 틀림없이 질겼을 겁니다. 

새알처럼 구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그 앞에서 시적 화자는 내면에 품은 큼지막한 비애를 나직이 축소시켜 몸가짐을 태연스럽게 합니다. 애달프거나 불편한 심중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편안하게 다독이고 거두어 주는 모습이 처연히 아름답습니다. 영원한 헤어짐이 어찌 아프지 않고 쓰리지 않겠습니까. 통고痛苦를 기껍게 인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애이불비(哀而不悲, 슬프기는 하지만 겉으로 슬픔을 나타내지 않음)가 또 있을까요. 능청스레 돌려대는 마음에는 황소의 눈망울보다 더 크고 결 고운 서러움이 오랜 바위의 더께처럼 배어 있습니다. 읽는 이의 가슴이 깊게 저리는 까닭입니다. 

“나주 들판에서 /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 풀을 뜯는 / 소의 발 밑에서 / 마침 꽃이 핀 거야 /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 그것만이 아니라, /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올린 거야 / 그래서, /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 하마터면, / 소가 중심을 잃고 / 쓰러질 뻔한 것이지” - 윤희상 〈소를 웃긴 꽃〉

소가 들판에 나와 풀을 뜯고 있습니다. 밥을 먹고 있는 한가로운 풍경입니다. 화사한 날을 맞아 꽃들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합니다. 막 피어나는 꽃을 거대한 몸집을 가진 소가 밟으면 꽃은 채 피기 전에, 꽃다운 나이가 되기도 전에 뭉개져 버립니다. 힘으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밟히려는 그 순간 죽지 않고 살아서 꽃을 피울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발바닥을 간질이는 것이지요. 바둑에서는 이를 묘수, 신의 한 수라 했던가요. 

그렇게 해서 간지럼을 탄 소는 기우뚱거리며 잠시 중심을 잃고는 쓰러질 뻔했습니다. 절명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꽃은 제 목숨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꽃의 번득이는 기지機智가 놀랍습니다. 소의 너그럽고 푸근한 성품이 빚은 너털웃음이 멋들어집니다. 시인은 얼토당토않을 것 같은 이 석연치 않은 상황을 기막히게 엮어 놓았습니다. 생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임에도 전혀 당황하거나 흐트러짐이 없는 꽃, 간지럼을 타 짜증을 낼 만도 한데 웃음으로 넘기는 소, 그거참 착상이 기발하지 않습니까. 순간을 포착하는 매서운 눈에서 익살스러움이 주는 아름다움, 골계미滑稽美가 빛을 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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