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그리고 인연. 20×16. 2020.
사람 그리고 인연. 20×16. 2020.

“저기 새로 생긴 서예원에 선생이 젊은 여자래, 거기에다 아직 이십대라던데” 

1999년 7월 스물여덟 되던 해. 유리창이 글씨로 가득한 이층으로 올라오며 사람들마다 젊은 여자선생이 신기한 듯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존칭어와 반말을 섞어가며 어색해 했고, 그래도 신기한 듯 쉬이 나가려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나는 곧장 큰 화선지를 펼치고는 그들 앞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글씨를 써 보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죽(風竹)을 쳤다. 현란한 붓놀림에 그들과 나는 바로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맞벌이 부모를 둔 아이들은 서숙(書塾)에서 자라나게 되었고,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가르치며 무덤가와 시장과 학교 근처에서 자란 아이들을 얘기해 주었다. 젊은 선생의 배가 불러오는 것도 보았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자라는 것을 보았다. 결혼 적령기를 넘긴 제자들은 글씨를 쓰면서 시집을 잘도 갔다. 도공을 꿈꾸던 가난한 청년은 후에 최고의 도예가가 되어 가마에서 꺼내는 첫 그릇을 선생에게로 들고 왔다. 그들은 선생님이 되었고 건축가가 되고 군인이 되고 일본에서 만화가로 성장했다. 

제자들의 나이가 지긋도 하여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는 그들의 부모님 영전에서 머리를 숙이기도 했고, 때로는 제자의 죽음 앞에서 가슴 먹먹함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들의 경사스러움에 서숙 안에서는 잔치가 벌어졌고, 안타까운 일이 다가오면 모두가 숨죽여 위로하기에 바빴다. 이십 년 세월에 수많은 인연들은 이곳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가슴에 품게 되었다. 

삼천포 번화가 골목길에서 술집보다 더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던 서숙(書塾)이 선생의 바쁜 공부에 잠시 쉬어 가려고 숨을 고르니, 그들은 추억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며 아쉬워했다. 누구는 이십 년, 누구는 십 년, 누구는 오 년...... 그곳을 아쉬워했다. 서숙이 가까워지는 길을 한여름 땡볕에 꽃무늬 양산을 쓰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고, 삼삼오오 예쁘게 차려입고 서숙 계단을 오르는 소녀 같은 제자들을 보았다. 이십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갱년기가 오던 사십 대 후반의 여자는 육십 대 후반을 넘긴 머리 희끗한 고운 여자가 되었고, 술 잘 사던 중년의 남자는 일흔을 넘겼지만 여전히 품이 넓은 사람이 되어 있다. 세월에 서로의 주름과 흰머리를 세어 주면서 이제는 그들이 선생의 공부를 박수치며 젊었던 선생을 염려하는 세월이 되어 있었다. 

“어머나, 선생님도 벌써 흰머리가 소복하다예. 우짜몬 좋노. 살살 좀 하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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