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뚫어져라 바라보는. 15×20. 2020.

일행과 함께 실안 앞바다로 나갔다. 하얀 돛을 단 배들의 정박에 베네치아가 이곳이라 여겼다. 소풍 가는 아이마냥 전날부터 날씨예보만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고, 맑은 날씨에 덤으로 바람도 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욕심을 부렸다. 진하게 내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챙겨서 돛을 단 배에 조심스럽게 올랐다.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 아주 푹 숙여 버리는 습관이 있다. 목주름을 잔뜩 잡고 정수리가 꺼지도록 힘껏 눌렀다가 고개를 들면 세상이 참 환하고 밝아진다. 그래서 고개를 숙일 때 그 흙빛은 땅이 꺼지도록 답답하고 어두웠다. 흙빛만 보다 검푸른 바다 위에 속절없이 몸을 맡겼으니 순간 내 감정의 사치를 부리던 게 생각났다. 뱃전에 앉아 고개를 푹 숙여 바다를 보았다. 일렁이는 물살에 어지러웠다. 뚫어져라 바닷속만 들여다보다 서서히 고개를 드니 바람만 지나다니는 텅 빈 하늘이었다. 이상한 감흥이 들통나지 않게 하늘 높이 치솟은 돛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육지에서 바라본 바다는 심심한 휴식이었고 궁금할 것이 하나도 없는 고요였다. 간혹 울고 싶을 때 달려가 멍하니 서있던 게 바다 앞이었고, 도시에서 온 친구와 함께 바라보던 게 바다였다. 올망졸망 떠있는 섬이나 흰 물살 선을 그으며 지나가는 배를 보면서 한 폭의 그림 같지 않으냐고 속삭였다. 노을이 질 때 그 바다를 물들인 붉은 기운에 곱다고 흥분하고, 구름이 무척 아름다운 하늘을 바다 앞에서 바라보았다. 육지에서 바다는 그저 나에게는 그림이었다.

저만치를 나가 바다 위에 배를 띄우고 시동을 멈춘다. 파도에 배를 맡기고 아무 일없다는 듯이 배가 바다 위에 앉았다. 바다에서 바라본 저곳은 만석꾼의 빌딩도 짧은 내 손톱만 못하고 시세를 자랑하는 명품 아파트도 담배 갑보다 더 작아진다. 아옹다옹 힘겨루기를 하는 사람들의 육신도 먼지보다 작아 보이지 않았고, 다투는 목소리도 끼룩 울어대는 갈매기 소리보다 보잘 게 없었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육지는 끝없이 풀어내는 실타래 같은 기억이었다. 서포 용현 남양 실안 창선... 뱃머리에서 한 바퀴 고개를 서서히 돌려보니 겹겹이 둘러진 산세 아래가 모두가 내 길이었다. 나는 저 길을 슬퍼도 달렸고 기쁨에 넘치면서도 달렸다. 그와도 달렸고 혼자서도 달린 길이었다. 방향을 바꾸고 저곳을 바라보니 책 속의 주인공마냥 나는 참 많은 이야기 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함께 배를 탄 그들도 나처럼 저마다의 생각을 풀어내고 있는가 보다. 침묵하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들만의 그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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