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여주기. 20×15. 2019.

옷 방 깊숙이 걸려있는 겨울 외투들을 손이 쉽게 가는 곳으로 다시 옮겼다. 작년에 즐겨 입던 검정 외투를 올해 처음으로 걸치며 옷매무새를 잡으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더니 무언가가 잡힌다. 지난겨울에 갔었던 음식점 카드 영수증과 빳빳한 명함 두 장이다. 명함에 적힌 이름을 한참 생각해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음식점과 연결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명함을 휴지통으로 보내야 할지 아니면 내 지갑으로 다시 가져가야 할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지만 누군가를 만나 인사치레로 받았던 명함이라 그런가 보다. 요즘 나는 며칠 전에 만난 사람조차도 기억이 가물거릴 때가 많다. 집중하는 일들을 제외하고는 무신경으로 대해서 그럴 것이라 나를 위로해 보았다. 

명함은 자기를 보여주기에 치열했다. 무슨 직함들이 그리 많은지 작은 공간 안에 활자가 빼곡하다. 나는 앞뒤로 직함이 빽빽한 명함에 눈길을 잘 주지 않는다. 그 무게감에 숨이 막혔다. 반면 사람은 가벼워 보였다. 자기를 이렇게까지 어필을 해야 사람들이 알아줄까 여겨지니 자랑하듯 적어놓은 직함은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랑하듯 적지 않으면 정말로 별것이 없을 거라고 여겨 버리는 세상 사람들의 편견에 숨이 막혔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명함을 보면서 참 슬프다는 생각도 한때 했었다.     

나는 명함이 없다. 멋지게 글씨를 써서 하나 만들까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나를 소개하기가 멋쩍은 자리가 있었고, 옆에서 나를 소개하는 모습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냥 명함 한 장 건네면서 저는 서예 하는 사람이로소이다 하고 싶었지만, 내 이름이 한번 만난 사람들의 주머니나 지갑에서 뒹구는 것이 싫었고 미안했다. 받은 명함을 버리면 그 사람에게 미안했고 가지고 있자니 머리만 복잡했다. 

차곡차곡 모아 놓은 명함들을 하나씩 넘기고 있으니 그 명함을 받은 후부터 관계가 깊어진 사람도 있었고, 이제는 소원해져 추억이 되어 버린 사람도 있었다. 친구가 승진해 새로 만든 명함을 건네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그때의 행복도 보였다. 지금쯤은 또 다른 명함을 꿈꾸고 있을 거라 여겼다. 회사 마크 옆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박은 소속감의 당당함이 보였으며, 간혹 좌우명과 같은 글귀를 적어 자기를 대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이라 적힌, 왕년에 건축계를 주름 잡다 퇴직한 사내의 정감 어린 목소리도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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