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청년이라 하고 남은 중년이라 한다. 20×15. 2019.

TV에서는 단풍놀이 간 사람들의 인터뷰가 한창이다. “와, 너무 멋져요. 이맘때가 되면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찾게 돼요.” 김OO. 대구 대명동 (43)... 자막에 그 남자의 동네와 나이가 적혀 있다. 서로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들. 순간 짧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나보다 다섯 살 어린 한 무리의 아저씨들이 카메라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머리는 벌써 희끗하거나 빠졌거나, 낯빛이 검붉어 나보다 열 살은 더 먹어 보이는 남자들을 보면서 저들이 세상을 좀 험하게 살아서 그럴 거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에게 중년은 저 멀리에만 있다고 여겼다. 

며칠 전, 서울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지하철에 앉아 앞을 바라보다가 참 재미있는 광경이 내 눈에 들어온다. 어쩜 자리를 앉아도 저렇게 앉을 수가 있을까. 여섯 명의 여자가 나란히 내 앞에 있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이십 대, 직장인 정장의 삼십 대, 조금 편안한 옷을 입고 쇼핑을 다녀온 듯 하는 사십 대, 풍채가 있는 오십 대, 큰 보석으로 잔뜩 멋을 부린 육십 대, 기력 없이 흐린 초점으로 앉아있는 칠십 대. 그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여자의 인생 몽타주 같다고 여겼다. 나이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 육십 즈음의 여자는 삼십 대 여자의 무신경한 젊음을 따라갈 수가 없었고, 칠십 즈음의 미인 소리 제법 들음직한 여자의 얼굴은 마르고 거칠었으나, 이십 대 젊은 여자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생기 있고 고왔다. 스르르 손이 내 볼살을 툭툭 치며 눈가 주름을 문질러 보고 있었다. 나도 저 사십 대 여자처럼 저 정도의 피부 탄력을 가지고 있을 저런 중년의 여자 이겠구나하고 여겼다. 

나는 항상 젊을 줄 알았다. 이십 대에 꾸던 꿈을 그대로 꾸고 있었고, 삼십 대에 하던 놀이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을 여사님, 선생님이라 부르며 어른 대접을 한다. 그들에게 중년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주며 가을을 닮았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는 나이는 항상 그 시점에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열 살 위를 만나면 나는 젊은 사람이 되어 있었고, 열 살 아래를 만나야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물리적인 숫자가 아니라 남이 기준이 되는 나이를 만들어 버리곤 했다. 

햇살 좋은 가을날, 찻집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으니 같은 또래의 사장이 아이스티를 가지고 내 앞으로 앉는다. “어머나, 중년의 남자가 이 계절에 아이스티를 드셔서 살짝 놀랬어요.”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는데, 저보고 중년이라고 하면 어떡해요.” 저 중년의 남자도 나처럼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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