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로소. 20×15. 2019.

어느새 하늘이 온통 빨개져 있었다. 노을이 아니고도 빨갈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지금 벚나무 시골길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꽃비가 내렸고 초록 무성한 그늘을 만들어 작렬했던 태양을 가려 주었던 때도 있었다. 이제 숨을 한번 크게 몰아 쉬어 올려다보니 가지만이 앙상한 가녀림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드러난 가지는 아직 붉은 기운이 채 가시지 않고, 더러 흐느끼듯 매달려 있는 잎마저도 온통 붉은 울음이었다. 얼기설기 하늘이 붉었다.  

“가을이라 너무 힘들어요. 제가 가을을 타나 봐요” 뜨거운 김이 오르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그녀가 말한다. 시월이 되면 라디오에서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콧수염이 멋진 성악가의 그 노래보다도, 기억도 흐려져 버린 큰 잠자리테 안경을 쓴 가수의 잊혀진 계절보다도, 이 나이가 되니 더 많이 듣는 가을앓이 푸념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또한 이 계절엔 엄청난 가을앓이를 하고 있어야 마땅했다. 소복한 낙엽만 보아도 눈물이 나왔고 노신사의 롱코트만 보아도 그의 살아낸 삶에 경건해져 버렸다. 하늘을 쳐다보아도 살갗에 스치는 바람만 느껴도 가을을 심하게 앓았다. 온통 그렇게 가을을 앓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 변하기 시작했다. 나의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었다. 24절기도 아니었다. 나의 절기는 계절이 아니라 계획이 되어 버렸다. 봄이 오고 가을이 오는 것으로 계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몰입하는 일상이 끝이 날 무렵 나는 비로소 계절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상에 마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마디가 나름의 절기가 되어 버렸다. 마디가 하나 둘 늘어 날 때에 나는 세월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 채 버렸다. 때로는 굵은 마디가 되기도 하고 가는 마디가 되기도 한다. 혹독한 일을 쳐 낼 때는 굵은 마디가 더 단단해졌다. 꽃이 피는 지도 몰랐다. 잔디가 파래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억새가 흐드러지게 지천에서 흔들릴 때 비로소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 버렸다. 빈 들녘에 한 무더기 코스모스를 보고 아차! 하고 가을을 바라보았다. 차를 세워 소리 없이 울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24절기가 기가 막히게 맞아...입버릇처럼 되새기며 절기를 누렸던 나는, 다이어리에 빽빽이 적어 놓은 일상으로 다시 입버릇을 만들고 있었다. “준비하는 요만큼은 겨울이고 펼쳐놓는 이때는 봄이잖아.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힐 때나 힘이 들어 울고 싶을 때는 환절기였지. 기가 막히게도 나의 계절은 어김없이 심장에서 먼저 온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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