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삼조 시인.

추석도 지난 지 며칠 되었다. 한낮의 햇볕은 아직 따갑지만 어쩐지 힘이 없는 듯하고, 아침저녁의 공기는 제법 선선한 맛이 난다. 서늘한 계절이 되었다. 이 계절을 맞으려 그랬던지, 숨 막히는 더위를 헤쳐 나오면서 태풍도 몇 차례 겪었다. 해마다 겪었고 또 얼마나 겪을 수 있을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계절의 왕성함이 우여곡절 끝에 다음 계절에 자리를 물려주는 이 자연의 당연한 ‘돌고 돎-순환(循環)’이 하나의 ‘놀라움-경이(驚異)’로 다가온다.

옛날 학창 시절에 누구나 배우고 들었음직한, 그러나 잊어버리고 있던 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선생이 쓴 ‘가을날’이 생각난다. 그 시의 앞부분 두 연은 “마지막 과일들을 결실토록 명하시고,/ 열매 위에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주시고, 마지막 단 맛이/ 짙은 포도송이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이다. 우리가 그처럼 싫어하던 더위가 사실은 오곡백과를 무르익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부분이다. 사람으로 친다면 더위라는 고통이 사람을 더 ‘무르익게’한 것이랄까. 

위 시 ‘가을날’의 뒷부분 한 연은 꼭 이 계절과 맞아떨어진다. “지금 외로운 자는, 오랫동안 외롭게 지낼 것입니다./ 잠 못 이루어, 독서하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가 그것이다. ‘외롭다’는 감정은 인간이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옛날 노래에 나오듯이 내 죽어 가는 저승길에 어느 후손이나 벗이 있어 길동무해 줄 것인가. 가족과 친지에 둘러싸여 외로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독서하며 생각에 잠기고 긴 편지를 쓸 수밖에 없다. 우리의 가을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그와 아울러, 가을은 갈무리하는 계절이다. 어질러진 것을 정리하여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아직도 더운 계절의 용맹과 분투에 젖어 언제까지나 어지르고만 있을 수는 없다. 17세기 중엽 중국의 명나라 말기에 홍자성이란 문인이 썼다는 ‘채근담(菜根譚)에 이런 글귀가 있다. 번역은 조지훈 선생의 것이다.

“손과 벗들이 구름같이 모여와 기껏 마시고 질탕히 노는 것은 즐거운 일이로되 얼마 안 있어 시간이 다하고 촛불이 가물거리며 향로의 연기는 사라지고 차(茶)도 식고 나면 즐거움이 도리어 흐느낌을 자아내어 사람을 적막(寂寞)하게 한다. 아! 천하의 일이 모두 이 같을진저! 어찌나 빨리 머리를 돌리지 않느뇨.”

올여름 우리나라는 여러 사건이 겹쳐 무척 뜨거웠다. 어느 게 맞고 무엇이 옳은지 구분하기가 정말 어렵다. 그래도 세월이 좀 지나면 거짓과 위선은 밝혀질 때가 꼭 있으리라 믿는다. 이제 머리도 좀 식히고 냉정히 정리도 좀 해야 되는 계절이 오지 않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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