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자나무.

향기 좋은 여름 꽃, 치자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면사포를 쓴 듯하고, 하얀 접시를 덮은 듯도 하다. 6개의 꽃잎에 노란색 수술이 어우러진 모습은 하얀 바람개비 같다. 세상의 모든 꽃이 제각각의 색깔과 모양을 자랑하지만 신비로움을 간직한 순백의 치자 꽃에 견줄만한 것이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찍이 선인들은 술잔에 꽃잎을 띄워 그윽한 향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즐겼다. 또한 치자의 하얀 꽃은 밤에도 그 빛깔을 잃지 않는다. 마실 나갔다 돌아올 때 마당 한편에 핀 치자 꽃이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던 기억이 있다.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혀주는 등대처럼 말이다. 

치자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진 꼭두서니과의 늘푸른 키작은나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부지방에 심는다. 가지치기를 해주어도 잘 자라기 때문에 요즘엔 울타리 용도로 심기도 한다. 잎은 타원형으로 마주나며 광택이 있어 하얀 꽃을 더욱 눈부시게 한다. 6~7월에 피는 꽃은 여섯 갈래이고 향기가 짙다. 심지어 “치자나무숲에 들어가면 치자 향기만 가득하여 다른 향기는 맡을 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 향기가 재스민과 비교될 만큼 진하여 영어로는 ‘케이프 재스민(Cape jasmine)’이라 한다. 가을에 익는 주황색 열매를 치자(梔子)라고 한다. 열매모양이 손잡이가 있는 술잔과 비슷하다 하여 술잔 치(卮)에 목(木) 자를 붙여 치자(梔子)가 되었다. 원래 한방에서 약명에 자(子),실(實),인(仁)이 붙은 이름은 나무의 열매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구기자(枸杞子), 매실(梅實), 행인(杏仁) 등이 있다.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화가인 강희안은 “치자는 꽃 가운데 가장 귀한 꽃이며, 네 가지 이점이 있다”라며 예찬하였다. “꽃 색깔이 희고 기름진 것이 첫째이고, 꽃향기가 맑고 풍부한 것이 둘째다. 겨울에도 잎이 변하지 않는 것이 셋째이고, 열매로 황색 물을 들이는 것이 넷째다” 강희안의 예찬처럼 치자 꽃 못지않게 치자 열매의 쓰임새도 아주 다양하다. 그중 으뜸으로 치자는 전, 과자류, 떡 등 음식의 색을 내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다. 치자만한 천연 색소가 있을까 싶다. 주황색 치자물을 내어 전을 부쳐주던 엄마표 부침개가 생각난다. 그 외에도 치자는 옛날부터 천연염료로 널리 사용했다. 삼베나 모시 등 옷감에서부터 종이까지 옛사람들의 생활용품을 아름답게 물들여왔다. 물들인 치자의 주황빛 색감은 인공색소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색감이다. 열매의 또 다른 쓰임새는 약재이다. 불면증과 황달의 치료에 쓰이고 소염, 지혈 및 이뇨의 효과가 있다. 치자나무와 비슷하지만 잎과 꽃이 작고 꽃잎이 겹으로 된 것을 ‘꽃치자’라고 한다. 흔히 꽃을 보기 위해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이 있는 네 모습/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 가는 고향의 슬프디 슬픈 해안통(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천막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청마 유치환의 시 <치자 꽃>이다. 청마는 치자 꽃을 보며 한 여인을 떠올렸다고 한다. 우리는? 하얀 치자 꽃을 본 후에 짧은 소감 한 줄이라도 남겨보면 어떨까 싶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