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逍遙. 10×20. 2019.

전시를 기획하게 되면 나는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이야기로 만들게 된다. 참 묘한 재주를 가졌는지, 묘한 기운이 그렇게 당겨졌는지, 아직도 난 이 묘한 숙제를 풀지 못했다. 시인과 소설가 못지않게 서예작가의 작업도 이야기이다. 가르침과 격언 속에 이야기까지 담아내면 더할 나위 없어진다. 요즘 부쩍 사람들 틈으로 나오게 되었고, 내 몸 처신이 내 의지대로만 되어 지지 않았다. 복잡한 관계가 잦아져 버렸다. 그럴 때마다 종종 하루의 끝자락에 서서는 온갖 상념을 다 짊어진 수도자가 되어 이 생각 저 생각에 허무한 소설을 쓰고 있다. 

조용히 서재에 불을 밝혀 책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어디쯤 있었을 텐데...” 온통 한자투성이 30년 묵은 책들이 수집광 책꽂이에서 어두운 방을 지켜내고 있었다. 오래된 책 냄새가 나의 부산함으로 더 진하게 느껴져 온다. “찾았다!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채근담(菜根譚). 그래, 이것으로 이번 작업을 해 보는 거야.” 

요즘은 예전처럼 집집마다 가훈액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나조차도 훈계하듯 벽에 걸려있는 글귀를 아주 싫어한다. 글씨가 예술이 되고 글귀가 예술이 되는 작품을 걸어 놓고 싶어졌다. 훈계가 아니라 잔잔히 파고드는 그런 속삭임 같은 언어를 전달하고 싶었다. 내 심장의 온도와 비슷한 글귀들이 나를 유혹한다. 내가 붓을 들어 쓰고 싶어 쓰는 것이 아니라, 홍자성 선생이 철없는 나를 유혹했다 여겼다. 

以我轉物者(이아전물자) 得固不喜(득고불희), 失亦不憂(실역불우) 大地盡屬逍遙(대지진속소요). 스스로 사물을 부리는 이는 얻었다하여 기뻐하지 아니하고, 잃었다하여 또한 근심하지 않으니 대지가 다 그의 노니는 곳이라.

나는 평상시 소요(逍遙)를 참 좋아했었고 그런 나는 소요(逍遙)를 새겨 내기 시작했다. 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하게 글씨를 써 욕심을 부리지 않고 새겼더니 제법 돌 위에서만큼은 욕심이 보이지 않았다. ‘이만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어디 있을까’ 중얼거렸더니 잃었던 패기가 다시 일어나고 근심했던 일들이 안개처럼 사라진다. 평상심에 도달하려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할까. 소요라는 두 글자를 각(刻)으로 얻었지만 크게 기뻐하지 아니하였고, 어깨의 통증으로 건강을 잃었지만 이 또한 크게 근심하지 아니 하였더니, 많은 사람들에게 “소요”는 숙연해지는 거울이 되어 주었다. 

채근담을 작업하는 동안 심한 열병을 앓은 듯하다. 주기도문을 외우듯이 반야심경을 외듯이 채근담을 수없이 중얼 거렸다. 작업하던 두 달여간의 일장춘몽에서 겨우 깨어날 수 있었다. 한바탕 질펀하게 참 잘도 놀았다. 소요(逍遙)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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