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삼조 시인

가로수로 심은 벚꽃이 활짝 피면서 거리마다 난리가 났다. 흐드러진 꽃의 잔치다. 이 꽃잔치에 수수백 번은 더 참여해야 되리라고 다짐이라도 하듯이 사람들은 꽃 아래 서성인다. 아름답다. 풍성하다.

수십만 그루나 된다는 진해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 사천도 벚꽃이 많다. 사천 벚꽃의 원조 격은 아무래도 선진리성 벚꽃이다. 이 벚꽃 아래서 하루를 음주가무로 즐기는 사람들을 그리 오래 안 된 기억 속에서 떠올려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고장 사람들은 선진리성 벚꽃을 좋아한다. 올해도 선진리성 일대에서는 벚꽃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 벚꽃의 화사함과 사람들에게 주는 기쁨을 잠시 미루어두고 우리 고장 선진리성에 벚꽃이 어떻게 심어지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한편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선진리성에 천여 그루 벚꽃을 심은 사람은 일본 사람이라 한다. 그 사람은 임진년 왜란 후 정유재란 때인 1598년에 이 선진리성을 방어하여 명나라 군대가 주축이 된 조선과 명나라 군대 곧 조명연합군을 물리친 전공을 거둔 일인의 후손이라 한다. 때는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8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597년 말쯤에 일인들은 그들의 퇴로를 걱정하여 이 선진리성 일대에 성을 쌓고 주둔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주변의 많은 우리 백성들이 노역에 동원되었겠으나 어쨌든 그들이 계획한 성이니 당연히 일본식 성(城)인 왜성이겠다. 이 왜성인 선진리성을 함락하기 위한 조명연합군은 왜군의 4배쯤에 해당하는 삼만여 명이었다 하나 불행히도 전투 중 화포의 오발로 인한 탄약의 폭발로 혼란에 빠져 막대한 전사자를 남기고 패퇴하였다고 한다. 이 때 죽은 조명연합군의 수가 우리 기록으로는 팔천 명이라 했고 왜인들의 기록으로는 삼만 명이라고 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 왜군이 거둔 대표적 승첩(勝捷)이라고 한다. 그래 그런지 과거 한때는 일본 학생들이 우리나라로 수학여행 올 때 이 선진리성에 들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선진리성을 복원해야 한다는 이유 중 하나로 일본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그 일본학생이나 일본인 관광객이 뭐 하러 선진리성을 찾았을까. 그들이 이긴 전쟁터를 찾아 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자는 의도가 아니었겠는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 선진리성을 복원한다면서 왜성으로 복원한 일이다. 역사의 기록을 들쳐보면 이 선진리성에는 이미 고려 때나 그 이전에 축조한 우리식 토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 토성을 기초로 하여 왜군들이 왜성을 쌓은 것이다. 그 왜성으로 인해 수많은 원혼이 떠도는 그 자리에 그 원혼을 달래주지는 못할망정 막대한 세금을 들여 하필 왜성을 쌓은 의도는 무엇인가. 지금이라도 왜성의 흔적을 지우고 화려하지 않을지는 모르나 원래의 토성 형태를 보완하는 방안을 강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벚꽃이 일본인의 어떤 정신을 대변한다 하여 굳이 멀리할 까닭은 없다. 그것은 일본인의 사정이고, 우리는 그 벚꽃을 꽃 이외의 목적으로 쓰려는 불순한 의도에 휘말려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을 선진리성의 비극과 함께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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