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삼조 시인

영국의 석학 토머스 칼라일은 그의 강연집 「영웅의 역사」에서 셰익스피어를 영웅으로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 말은 대략 “만일 우리 영국인에게 인도와 셰익스피어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 하면 우리는 인도야 있든 없든 상관없으나 셰익스피어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라는 요지이다. 인도라는 물질적인 것은 얻을 수도 있고 잃은 수도 있지만 셰익스피어와 같은 영국을 가장 영국답게 하는 정신적인 것은 절대 잃을 수 없는 것이라는, 그 ‘정신’을 핵심으로 읽을 수 있는 말이다.

어느덧 100주년을 맞은 3·1운동도 어느 때나 우리 겨레의 앞길을 밝힐 ‘우리의 정신’으로 남았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그 흔적이야 온전할 리 없다. 더구나 3·1운동을 일으키게 한 원인이 된 일본 제국주의 통치시기를 거쳤으니 일본은 그 3·1운동의 흔적을 지우기에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혼’과 그 정신은 지울 수 없었다. 꼭 외세와의 투쟁은 아니더라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 하고 목숨을 바쳐 정의를 추구하고자 했던 4·19를 필두로 한 여러 혁명과 의거들이 그 정신을 이은 사실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어느 시대에나 가장 큰 일은 아마도 ‘죽음’이 아닐까 싶다. 죽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그 아득한 죽음의 공간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때 우리 선조들은 자주와 자유를 목청껏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것은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넘보는 어리석은 일이 결코 아니었다. 옳은 일을 하고자 한다는 거룩한 ‘정신’이자 우리가 최후까지 지켜야 할 ‘넋’이라고 할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의 연약한 몸을 저 왜구의 총칼 앞에 놓았을 리가 없다.

제암리 교회의 참상에서부터 감옥에서 순국하신 유관순 열사에 이르기까지 그 희생의 안타까운 혼과 정신이 아직까지도 생생히 살아 있는데 일본은 우리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물고 늘어진다. 칠천오백여 순국열사와 이만에 가까운 관련 부상자를 적시하니 통계에 오류가 있다면서 유감 운운한 것이다. 만세 행렬을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해 놓고도 그 죽은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한다면서 호들갑을 떠는 저 뻔뻔함을 어찌 참을 수 있을까. 저 일본의 숫자놀음은 조금이라도 죄를 덜어보자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무단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제 이익을 도모한 도적질을 엄숙히 나무란 3·1운동의 정신을 짓밟은 비양심적이고 몰염치한 행위이며 자기들 죄상을 스스로 폭로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3·1운동의 정신은 살아, 오늘도 우리의 걸음걸이를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이런 정신이 사라질 리 없다. 이 3·1운동에 자극받고 그 정신을 드높이고자 바로 그 해 중국 땅 상해에 자리를 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해방 후의 대한민국 역시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니 3·1운동은 100년 전의 지나간 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으로서 더 뚜렷이 살아 지금도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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