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의 배우며 가르치며]

▲ 송창섭 시인

‘정의의 여신상’이 지닌 저울을 가리켜, 접시저울, 양팔저울, 평행저울, 천칭(천평칭의 줄임말)저울, 평형저울, 정의의 저울, 평등한 저울 등 다양하게 부릅니다. 영어로는 ‘The Balance’라 합니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지요. 양쪽이 모두 평평하다, 공평하다, 같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근간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정의(正義)’라는 말을 사전은 이렇게 풀었습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불의(不義)에 맞서는 것, 법전 따위의 바른 뜻, 플라톤의 철학에서 지혜와 용기와 절제의 완전한 조화를 이르는 말.’ 이 정도면 정의가 얼마나 성스럽고 올바르며 숭고한 가치를 지닌 멋진 말인지 충분히 동의하고 공감하겠지요.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되뇌고 싶지 않은 고통스런 정의, 분노의 정의, 절망적 정의, 퇴폐적 정의도 있었음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제5공화국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시절에 외쳤던 대표적인 구호가 ‘정의 사회 구현’이었습니다. 복지 사회 건설, 선진 조국 창조와 함께 위세를 떨쳤던 말이지요. 군사정권의 ‘정의’는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삼권을 장악하여 인권 유린, 부정 축재 등 온갖 국가적 사회적 비리를 저지른 불의의 온상이었습니다. 정권이 탄생한 뿌리부터 기형이었음을 헤아리면, 제5공화국의 정의는 정의에 역행하는 정의 곧 불의였습니다.

1958년 핀란드의 보수 인사들이 모여 핀란드기독연맹이라는 보수 정당을 창당하면서 내건 목표가 종교적 신념에 따른 ‘정의 사회 구현’과 종교 및 언론의 자유였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 누가 시행하느냐, 어느 시대에 사용했느냐에 따라 내용과 의미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대법원장을 지냈던 사람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이 사회는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예견이 제발 사실이 아니고 허위이길 바라는 기대감을 이 순간에도 부여잡고 있습니다. 그런 실낱같은 믿음이 와르르 무너진다면, 이 땅에는 법이며 양심이며 정의며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건 이미 생명을 상실한 시체법이요 악취를 뿜는 부패한 양심이요 몰락한 정의일 뿐입니다.
  
인용하기엔 너무 낯익고 진부하지만, 우리의 슬픈 자화상을 보면서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다시 떠올립니다.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에 자유가 새로이 탄생하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우리 정치에, 우리 신앙에, 우리 사회에, 우리 국민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진정한 정의의 개념이 아닐까요.
 
사람은 신이 아니기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또 누구에게나 실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이마저 무조건 단죄하지는 않습니다. 사리 분별하여 관용으로 받아들이는 지혜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의적이고 악의적이며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저지르는 죄악은 많은 이들의 희망을 짓밟습니다. 이를 실수라고 치부하기엔 그 폐해가 너무 큽니다. 일련의 사태를 보며 지금부터라도 다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모두에게 공평하며 모두가 존경하고 모두가 신뢰하고 모두가 수용하는 ‘정의의 여신상’으로 거듭 태어나고 거듭 깨어나길 손 모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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