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개그 콘서트’를 챙겨서 봤다. 저게 뭔가 싶다가도 가끔은 따라 웃기도 했다. 허나 이제는 볼 일이 없다. ‘저 따위를’ 하는 생각이 먼저 들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후지다’고 보지 않는다. ‘개콘’도 저만치 나를 앞서 있는데, 아이들 정서는 그보다 훨씬 멀리 가 있다. 그런 애들에게  낡은 감수성으로 재단하려 드는 나는 영락없는 꼰대다.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이제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그 관계 설정이 들쑥날쑥이다.

귀한 남의 댁 자녀를 불친절하게 대할 권리를 어느 누구도 내게 준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내게 말을 걸어오는 애들에게 퉁명스럽기 일쑤였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떠들면서도 실상 내 생활 태도는 권위주도 뭣도 아닌 갑질이었다.

출근길, 삼천포 하나로 농협 앞에 ‘학생 인권 조례 반대’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며칠을 지나치다 불현듯 뜨끔해졌다. ‘침묵은 곧 동의’라는 말도 있잖은가? 문제는 내 인권의식이었다.

미투 운동, 연일 터져나오는 갑질 행각과 약자를 향한 ‘묻지마 폭력’ 이슈화, 영화 ‘미쓰 백’이 제기하는 아동폭력 …. 이것들은 곳곳에 도사린, 견고한 보수적 삶의 성채를 허물면서, 우리의 인권적 감수성을 끌어 올리고 있다. 촛불혁명의 완성은 이렇게 올 것인가 보다.

그것들로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급속하고 압축적인 사회변화는 첨단의 기술 문화가 가져온 새로운 삶과 의식에, 사라졌어야 할 과거의 낡은 것들을 마구 뒤섞어 놓았다.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 그들은 바로 이 낡은 정서와 감수성을 들쑤셔, 새로운 아젠다로 내세워 국면의 전환을 기획하고 있다.  “인권 조례는 학교에서 동성애를 가르치려는 것이다”는 엉터리 뉴스를 유투브에 퍼뜨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권 조례 반대’ 펼침막은 그래서 나왔다. 누가 내걸었는지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나도 그랬지만, 지역의 진보 단체들에게서도 제대로 된 대응이 없다. 익명의 그늘에 민낯을 숨기고, 낡은 감수성을 부추기는 극우의 책략에 나처럼 둔감한 탓일까? 의식 깊숙이 박힌 낡은 정서가, 더욱 날카롭게 벼려야 할 우리의 감수성을 갉아 먹었기 때문일까?

‘의식의 민주주의, 생활의 보수주의’, 오래전 임지현이란 이가 꺼낸 화두다. 그때 나는 공감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지나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거기서 벗어났다고 여겼으리라.

착각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스스로를 돌아봐야겠다. 누군가 제기한 문제에 머리 끄덕이고 박수치며 행동에 나서는 것은 매 순간마다 어려운 결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지난하고 어려운 일이 당장 내 주변 일들에 촉각을 곤두세워 내 속의 낡은 정서를 청산하는 일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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