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삼조 시인.

‘뭣이 중헌디?’라는 말이 종종 들려서 검색해 보니 영화 「곡성」에서 나온 대사라고 한다. 영화에서는 귀신에 씌었는지 괴질에 걸렸는지 모를 여자아이가 제 아비에게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말로 나온다. 이 말이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이 말을 제목으로 삼은 대중가요까지 등장하고 있어 그 파장이 만만치 않다. 말의 유행은 사람들의 관심을 대변하는 일이라 할 것이므로, 이 말의 유행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일’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그 판단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롭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그 중요한 일의 하나는 최저임금 문제가 아닌가 싶다. 최저임금위원회란 곳에서는 “최저임금제란 국가가 노·사간의 임금결정과정에 개입하여 임금의 최저수준을 정하고, 사용자에게 이 수준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으로 강제함으로써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 라고 규정하고 1988년부터 시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당연히 좋은 취지로 도입한 것이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임금을 적게 주려하고 노동자 입장에서는 많이 받고자 하는 상반된 생각의 접근이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특히 현 정부 들어서 급격하게 최저임금을 올렸고 또 올리고자 하는 탓에 사용자들이 고용을 꺼리거나 줄이게 되어 일자리가 감소하고 그와 함께 노동자들의 실제 수입도 전체적으로 보면 나아진 것이 별로 없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정부에서는 노동자들의 임금 소득이 늘면 자연히 소비도 늘어날 것이므로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가 활성화되어 사용자와 피고용인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라 하지만 아직 그 효과를 쉽게 찾기 어려운 모양이다. 무엇이 중한가. 판단이 어려운 중에도 원칙론이라 할 말을 꼭 찾고자 한다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선 대략 이천삼백 년 전에 나온 「맹자(孟子)」라는 책에 나오는 “무항산(無恒産)이면 인무항심(因無恒心) - 떳떳한 생업이 없으면 그로 인해 떳떳한 마음이 없다.”는 말을 새겨봄직하다. 일반 백성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수입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사람답고 떳떳한 생각과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내년의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대략 174만 원 정도가 되리라고 한다.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나 씀씀이가 다르다고 할 것이나 이 정도로 부모 봉양과 자녀 부양이 가능할지를 헤아릴 수는 있을 듯하다.

사용자, 특히 큰 사업을 벌이는 사람들이 꼭 명심해야 할 말로는 이런 것도 있다. 명나라 때 섭자기라는 사람의 말로 “일가부귀 천가원(一家富貴 千家怨) - 한 집안의 부귀함에 천 집안의 원망이 있다.”라는 것이다. 하나의 부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희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의미로 쉽게 새길 수 있는 말이다. 고용인을 부리는 사람들은 나의 위치가 누구에 의지하여 이루어져 왔는가를 새겨 보고 좀 더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참말로 무엇이 중한가를 거듭 새겨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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