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방에서 느끼는 인생의 즐거움

▲ 人生之樂(인생지락), 25×25, 2018

밤새 갈아놓은 진한 먹물/ 깊은 못을 이루었고/ 흑심 품은 주인장은/ 연지 속에 붓을 담가/ 일필휘지 급한 마음/ 벼루못에 꽉 채우니/ 움푹 파인 둥근 바닥/ 공부 흔적 보란 듯이/ 도도하게 당당하게/ 나의 저렴한 이 벼루가/ 단계연보다 귀한 대접/ 이것이 나의 인생일락이라.

 먹을 가는 이 습관은/ 마음 가는 것 이었다/ 온 우주를 상상하는/ 창조자의 습관으로/ 점점 짧아지는 내 먹만큼/ 점점 늘어가는 나의 우주/ 닳아 버린 그런 탓에/ 먹물 속에 손 잠기니/ 손톱 사이 끼는 검정/ 부끄러운 희열이다/ 반동가리 먹이 쌓여/ 높은 산을 이뤄가니/ 이것이 인생이락이라.

 붓을 던져 첫 번짐에/ 파고드는 묘한 감동/ 완급 질삽 상상되는/ 결 좋은 화선지가/ 뽀얀 속살 드러내며/ 덤이덤이 쌓여지고/ 귀한 분께 받은 종이/ 내 필력을 기다리니/ 이것이 내 인생삼락이라.

 길고 짧고 가늘고 두껍고/ 크고 작고 새롭고 오래된/ 가득 채운 붓걸이에 / 먹색 빠진 회색붓털/ 어느 부잣집 사모님의/ 값비싼 코트 그 털보다/ 너를 더 귀히 여겨 주인장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품어준다 쓸어준다/ 이것이 인생사락이라.

 책꽂이에 두꺼운 화집은/ 비싼 몸값이 주는 이 당당함/ 상형문자 가득한 자전들과/ 금박으로 이름 박힌 누군가가 / 깊은 밤을 눈 비비며/ 지식을 한껏 쏟아 부은/ 전문서적 중한 무게감도/ 빛바랜 구수한 책 냄새에/ 그 위엄 양보 하네/ 이것이 나의 인생오락이라.

 글 읽는 소리 서숙에 지극하여/ 이리 오너라 노자장자 공자맹자/ 그들의 삶속으로 깊숙이 다가서서/ 가라사대 물어보고/ 가라사대 끄덕이고/ 나의 어리석음 깨우치는/ 이 짙은 문자향이/ 이것이 나의 인생육락이라.

 당대 안진경 송대 황산곡/ 명대 동기창 청대 제백석/ 시대의 간드러지는 멋쟁이들/ 내 방랑벽 핑계 삼아/ 필력 따라 만나는 이 바람기/ 그 은밀한 즐거움은/ 이것이 나만의 인생칠락이라.

 어린 작은 손으로/ 도원결의 하듯 맺었던 첫 만남에/ 붓이라는 이 도구가/ 긴 인연을 건너와서/  삼십년 지난 세월/ 한결같은 심정으로/ 너를 붙들고 버티어 온/ 그 의리 져버리지 않았으니/ 인생에 변하지 않는/ 동반자 하나 든든하다/ 이것이 나의 인생팔락이라.

 묵향 짙은 서숙에 앉아/ 차 한 잔 잘 우려내어/ 잔에 따라 받쳐 드니/ 천둥벼락 치던 한여름의/ 북경의 화려한 밤/ 어느 호텔라운지 바에 앉아/ 들었던 선율 그리워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노라존스를 다시 듣네/ 혼자만의 이 깊은 시간/ 이것이 또 하나의 인생구락이라.

 그리하여 그리하여/ 밤새 꺼지지 않을 수 있는/ 서숙의 하얀 유리창 불빛/ 이것이 나의 인생십락이라.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