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역사적 가치 재조명 필요.. '혈봉표'로는 전국 유일

경남 사천의 천년고찰 다솔사(多率寺)에 오르노라면 빽빽한 장송(長松)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 일품이다. 이 길을 오르다 숨이 턱에 찰때 쯤, 집채만 한 바위를 만나게 되고 그 바위에는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고 음각한 글이 쓰여 있다. 핏빛으로 채색된 각자(刻字)는 무언가 무거운 절규를 느끼게 한다. 제작연대 역시 음각되어 있는데 청나라 연호인 ‘광서(光緖)11년 을유(乙酉) 구월(九月)’이다. 정리하면,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85년 9월인 고종재위 22년에, 임금의 명으로 다솔사 경내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금한 표식이다.

나랏님이 보살핀 사찰의 의미를 지닌 '어금혈봉표 암각비' 광서11년 을유 구월에 조성했음을 알리는 각자(刻字)가 또렷이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다솔사를 즐겨 찾는 신도 조차 이 암각의 의미를 모르고 스쳐 지나간다. 이 거대 자연비석은 사천왕상의 수호 장군처럼 묵묵히 바람과 비를 맞으며 절로 오르는 오솔길을 홀로  지키고 있다. 이 봉표는 천년가람을 지켜온 상징물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한 흥선대원군과 대원군을 축출하기 위해,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 요청으로 진압한, 중전(명성황후)세력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어수선했다. 급기야 대원군이 청나라의 천진으로 압송되었다가 운현궁으로 돌아와 재기를 노리던 시기가 1885년의 중앙조정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지방관의 기강이 헤이해질 것은 당연지사였다. 당시 경상감사가 봉명산 다솔사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혈인데, 이곳에 부친의 묘를 쓰면 가문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절에 사람을 보내 이장준비를 지시하면서 다솔사는 발칵 뒤집혔다.

다솔사의 경내. 대양루 맞대지붕은 간결하면서도 넉넉하다. 천년고찰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당시 수도승인 봉암스님을 중심으로 이 같은 탐관오리의 비행을 조정에 직소하기위해 승려와 신도의 연명을 받은 탄원서를 모아 상경을 결행한다. 기록에는 때마침 청나라로 향하던 조공사신행렬(일명 동지사)을 만나 그 관리에게 하소연했다고 돼 있으나, 그 시기를 고려할 때 동지사가 아니라 그해 8월 국경회담을 위해 청으로 향하던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행렬을 만난 듯하다. 참고로 동지사란 조선시대에 해마다 동지에 정기적으로 명과 청에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당시 감계사 대표는 이중하 공조참의가 맡았는데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분이었다. 후에 을미의병 거사로 많은 관리가 죽었으나 당시 관찰사였던 이중하는 백성의 존경을 받던 분이라 봉변을 당하지 않았단다.

한편 승려들로부터 이 같은 지방관리의 비행을 전해 듣고 즉석에서 서찰을 적어주며 이를 경상감사에게 전하라며 행렬을 돌려 군왕께 후보고 하였다는 일화다. 아마도 청으로부터 간도영역의 국경을 침탈하려는 청나라의 공세와 탐관오리의 사찰을 넘보는 행위가 같은 불의로 다가와서일까?

봉표의 표(表)가 일반적인 봉표(封標)의 표(標)와 다르다

승려들은 기쁜 마음으로 문경의 한 주막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우연하게도 곤양군수로 부임해 가는 신임 목민관을 만나게 되었단다. 인사를 고하고 그간의 사정을 아뢰자 그 군수는, 서찰을 자신에게 맡길 것과 부임보고를 할 때 전하겠다는 약속을 했단다.

부임보고를 마친 신임 곤양군수는 다솔사의 일을 논하자, 경상감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다. 하지만 신임군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어명이요!”라고 외치며 “어금혈봉표!”라고 외쳤고, 경상감사는 무릎을 조아리고 벌벌 떨며 일어나지를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인지 거대비석에 쓰인 어금혈봉표의 표(表)가 일반적인 봉표(封標)의 표(標)와 같지 않음은 어명의 서찰을 옮겨 쓴 것이기에 그런가하고 추측해 본다.

“御禁 穴封 表!” 임금께서 무덤을 막을 것을 명한다는 친서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봉표는 어명의 행정적 지휘인 반면에 다솔사 봉표는 직접적 지휘서신인 셈이다. 이후로 다솔사 경내에는 어떤 분묘도 쓸 수 없었다. 따라서 '나랏님이 구한 다솔사'라는 표현이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 다솔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기념비’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자연 사랑을 배워야 한다. 인문사에 있어 건축물도 문화재이겠지만 이 같은 정신문화적 기념비 역시 문화재의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늦게나마 지방자치단체도 의미를 되새겨 지정문화재로서 복원하고 관리하여야 할 의무가 높다 하겠다.

토문감계사 이중하,강직한 성품의 관리로서 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내려 온 적도 있다.


토문감계사이야기를 마저 이어 가자. 이중하는 청조의 관리에게 ‘내 목을 자를 수는 있겠으나 국경은 단 한치도 내어 줄 수 없다’며, 백두산정계비 답사를 요구하고 끝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는 국경 획정을 거부 했다. 조선의 국경은 1712년 숙종38년에 확정하고 백두산 정상에 세운 비석의 기록대로 두만강이 아닌, 토문강 즉 송화강의 지류가 경계임을 주장하자 청의 관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유지한 간도평야의 국토는 1905년 을사늑약에 따른, 일본제국주의의 계략에 의해 자행된 간도밀약에 권리를 빼앗겼다.  청의 정계비 해석을 공인하는 대가로 만주 철도부설권을 양여받았고 이 밀약은1909년 9월4일 체결되어 올해로 100년이 지나 버렸다.

조-청간의 국경이, 토문을유감계 담판에서 이중하의 용기 있는 기백과 백두산정계비가 있어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다솔사도 조선사회의 천민으로 전락한 승려의 용기와 이 ‘어금혈봉표 기념비’가 지켜 주었다.

창바이지역, 우리말로 장백지역이고 백두산이 있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강이 압록강을 비롯 두만강과 송화강이 있는데 송화강의 지류가 토문강이다.

한 시민단체가 최근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에 의미있는 소송을 냈다. 소위 청일 간도밀약무효소송이다. 협약이 체결 된지 100년만의 일이다. 아쉽게도 백두산정계비는 사라져 버렸다. 일제에 의해 뽑혀 어딘가에 버려졌다.  탁본이라도 전하여 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다솔사 역시 마찬가지다. 기념비를 소중히 간직하고 관리해야 하는 이유가 이래서이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