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사천을 빛낸 인물] 구암(龜巖) 이정(李楨) ①

▲ 구암 이정 선생 초상화.

#정치가, 성리학자, 교육자
구암 이정(1512~1571)은 조선중기의 학자로 정치가요, 성리학자요, 교육자다. 사천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다.

사천읍 구암리에서 출생한 이정은 어린 시절부터 천재였다. 당시 우수한 소년들을 모아서 여름에 하과(夏課)라 하여 공부를 시키고 우수자를 뽑았는데, 12세 소년 이정은 경상도 전역에서 장원을 했다. 그 때의 글 홍문연도가 지금도 명문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문연도는 홍문의 잔치라는 말인데, 중국의 유방과 항우의 정치적 대결이 있었던 사건을 말한다.

17세에 성균관에서 공부하여 특별함을 보였다. 23세, 그는 사천에 유배 온 규암 송인수에게 나아가 제자가 되었고, 뒤에 24세, 곤양군수 관포 어득강에게서도 배웠다. 25세에 대과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명문가의 집안으로 내려오지 않은, 그리고 궁벽한 지역의 젊은이가 장원급제한 일은 매우 놀랄 일이었다. 조선이 놀랐다.

구암은 고위 관직을 두루 맡았는데, 그 중에서도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학자들만 근무하는 홍문관에서 부제학을 제수 받았다. 홍문관은 뛰어난 학자들이 학문을 토로하는 곳인데 그곳에서 퇴계와 같이 근무하기도 하였고, 죽을 때까지 퇴계와 구암은 특별히 친분이 있게 지냈다. 경북 안동에서 퇴계는 자주 사천을 찾아 왔다.

#퇴계와 남명은 학문적 벗
구암이 특별한 것은, 그가 천재라서 만이 아니다. 구암은 교육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가 출판한 서적은 조선 500년사에서 가장 많다. 지금도 학계에서 조사 중인데 어쩌면 조선조 출판한 모든 성리학 저서를 모아도 구암 한 사람보다도 못할 수 있다. 퇴계도 구암에서 서적을 가져가고 가끔 구암이 읽어본 서적을 퇴계에게 읽어보시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구암은 퇴계보다 11살 연하지만, 그래서 퇴계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단순한 사제지간으로는 볼 수 없다. 구암은 남명 조식과도 매우 친하게 지냈다. 심지어 구암은 남명이 살고 있는 산청 덕산의 산천재 옆에 집을 짓고 같이 살아보려고 할 만큼 친하게 지냈다.

사천은 조선시대에는 매우 궁벽한 곳이었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조그만 고을에 불과했다. 독립적이지도 못하여 고성 군수의 지시를 받는 지역이었다. 바다는 진주목에서 관리하였다. 조정에 나간 인물도 없어 벼슬길에 나가는 일은 사천에 사는 사람으로는 꿈이었다. 도대체 이러한 곳에서 어떻게 구암은 학문을 닦아서 장원급제를 하였을까? 그것도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구암은 역사의 가치관이 매우 뚜렷하였다. 그가 경주부윤에 임명되어 갔을 때, 당시 신라의 왕조는 사라진 지 600여년 지났기에 왕릉은 허물어지고 신라의 유적 유물이 폐허로 남아 있었다 한다. 이를 본 구암은 경주부윤 3년 동안 경주 복원에 나섰다. 왕릉을 복원하고 건물을 다시 재건하고, 김춘추, 설총, 최치원을 모신 서원도 건립하였다. 지금의 서악서원이 그것이다.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인물을 평할 때, 그의 벼슬이 어떠하였는가를 두고 벼슬이 높으면 훌륭한 인물, 벼슬이 낮거나 없으면, 별로 특출하지 않는 인물로 평가를 하는데, 이는 정말 잘못된 평가다. 왜냐하면 유학을 공부한 사람은 높은 벼슬을 하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훌륭한 선비는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벼슬을 굳이 싫어하지는 않았다. 공자가 벼슬에 나아가 백성을 위해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높은 벼슬이나 낮은 벼슬은 가치척도가 아니었다. 구암의 벼슬은 영의정이나 좌의정처럼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요직에 있었다.

▲ 구계서원 전경. (사진=뉴스사천 DB)

#고향 사천에 돌아온 구암
과거급제는 33명을 선발하나, 장원급제는 벼슬이 종6품급으로 특별히 높고, 그 외는 7품, 8품, 9품급 등으로 성적순으로 벼슬등급이 정해진다. 그래서 구암은 25세에 종6품 선무랑으로 시작하였다. 26세에 정5품이 되었는데 이때 명나라 서장관으로 가게 되었고, 엄청난 서적을 중국으로부터 구입하여 왔다. 이 책들로 우리나라 성리학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그의 벼슬길은 순탄하여 30대에 정3품 통훈대부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사천이 그립고 부모님이 그리워 고향이나 고향 근처로 가기를 원하였다. 효성도 지극하였다. 그래서 30대에 경상도지역 군수를 여러 곳 역임했다. 그때에 같이 교유했던 사람들이 퇴계 이황, 신재 주세붕 등이었다. 사천에 모여 학문과 자연을 즐겼다.

구암의 학풍과 성리학에 대한 업적은 지금 한창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20여 년 전까지도 구암의 학문에 대하여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필자는 이러한 일이 너무 안타까워 당시 문화원 오필근 원장과 협의하여 구암학술대회를 시작하였다.

그때부터였다. 구암은 매년 발표되는 논문들로 인하여 우리나라 학계에 점점 알려지게 되었다. 구암이 장원급제하였으니, 사천에서 조선시대과거시험을 재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구암제’라는 과거행사도 실시하자고 건의하여 경복궁에 가서 과거장소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실시하고 있다. 전국에서 몰려오는 많은 한학자들을 구암은 아마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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