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주가 만난 사람] ⑧ 독일 바이마르 국립극단 테너 이종궐

▲ 삼천포가 고향인 테너 이종궐 씨가 오랜만에 사천을 찾아 그의 음악인생을 들려줬다.

가난 뿌리치고 열정으로 살아온 음악인생
가족과 독일행 … '바이마르 국립극단에 서다'
"50세 되는 해, 사천문예회관에 오르고 싶어"


폭염특보가 일상이 되어가는 바깥 날씨에 아랑곳없이 대형 냉장고에라도 들어선 듯 선선한 공기가 반가운 곳. 사진, 그림, 조각품 등 다양한 예술작품에 달콤한 와인이 어우러져 눈과 입이 함께 호강하는 곳. 한때는 철도였던 폐터널이 특별한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 곳. 사천시 곤명면 신흥리에 있는 ‘와인갤러리’다.

7월의 마지막 주말, 이곳 와인갤러리에선 귀까지 호사를 누리는 이벤트가 있었으니, 사천 와인갤러리 축제 일환의 작은 음악공연이었다. 테너, 바리톤,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묘한 공명을 일으키며 ‘날 것’ 그대로의 큰 울림을 주었다.

이 공연은 와인갤러리(대표 조현국) 측이 마련했지만 그 중심에 테너 이종궐 씨가 있어 더욱 빛났다. 독일 바이마르 국립극단 단원인 그가 고향 후배를 위해 동료들과 기꺼이 시간을 내었기 때문이다. 가곡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감동의 시간을 뒤로하고, 그의 음악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테너 이종궐. 그는 1970년 사천시 선구동에서 태어났다. 삼천포초-삼천포제일중-삼천포고를 졸업한 그는 학창시절에 다니던 교회에서 성가대 단원으로 활동하며 노래의 꿈을 키웠다.

“처음엔 이렇게까지 올 줄은 몰랐죠. 그냥 주위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신나서 했던 건데, 상도 받고 하다 보니까 점점 더 큰 꿈을 꿨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의 꿈은 시련으로 시작했다. 가난이 문제였다. 이는 곧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이어졌다. 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는 하나 뿐인 자식임에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는 현실에 더욱 마음을 닫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이 씨는 포기하지 않았고, 돌아갈지언정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택했다.

“곡절이 많았죠. 남들 다 하는 레슨도 제대로 못 받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1년간 독학 하다시피 해서 한양대에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어요. 안 되겠다 싶어 음악교사라도 할 요량으로 이듬해 경상대 음악교육과에 들어갔는데, 체질에 안 맞더군요. 한 학기 만에 포기하고, 연말에 다시 도전해 다행히 합격했죠.”

그는 1992년, 또래보다 3년 늦게 한양대 성악과에 들어갔다. 가정 형편이 특별히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작은아버지가 등록금을 대신 내어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고는 곧 군에 입대했다. 무엇보다 시간을 벌어야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제대 후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학업을 마무리했다. 1999년 졸업 후엔 서울시립합창단 단원과 그가 다녔던 학과 조교로 활동하며 각각 1년과 2년을 보냈다. 그 즈음, 국내에선 성악가들의 활동무대가 너무 좁다는 현실에 눈을 떴고, 결국 외국에 나가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유학을 결정했다. 목적지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음대 오페라과였다.

“그때가 2002년이었는데, 막막했죠. 어찌 보면 좀 무모하기도 했고. 같이 시험 본 사람이 100명 쯤 됐는데, 그 중에 제가 나이가 제일 많았으니까. 32살! 면접관들도 신기하게 보더라고요.”
그의 유학길엔 20개월 된 딸과 아내가 동행했다. 석‧박사 과정을 밟는 5년의 시간 동안 가족은 짐이 되기보단 더 큰 힘이었음을 그는 강조했다.

▲ 와인갤러리에서 특별 공연중인 이종궐 테너.

“처음엔 걱정이 많았어요. 언어도 잘 안 통하니까. ‘나를 건사하기도 힘들 텐데, 가족까지 챙길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이 컸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가족이 제일 큰 버팀목이었어요. ‘나를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깟 일로 포기할 수 없지.’ 이런 생각을 하게 했던 거죠. 편안함을 주는 동시에 강한 책임감까지 지우는, 어떤 원동력이랄까.”

그는 무엇보다 좋은 스승을 만난 일을 큰 복으로 여겼다. 그의 스승은 세계적 명성의 테너 ‘프란치스코 아라이자’이다. 이 씨는 오늘의 자신을 두고 “다 그 분 덕”이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그렇게 힘든 공부를 마친 이종궐 씨. 공부가 끝나면 국내로 복귀하겠다던 첫 마음을 그는 접고야 말았다. 음악가, 특히 성악이나 클래식 전공자들의 설 자리가 여전히 척박한 현실 탓이다. 반면 독일에서는 클래식이 대중음악처럼 친근하게 여겨지기에 그 만큼 무대가 많단다.

그는 졸업 후 포르츠하임 시립극장에서 3년 반 활동하다, 2010년 바이마르 국립극장으로 옮겨 지금까지 테너로 활동 중이다. 그는 소개할 수상 경력이 있느냐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없다”고 받았다.

“보통 콩쿠르나 대회에 나가려면 30세 이하여야 하는데, 저는 이미 많이 늦었더라고요. 그리고 상을 받는 건 특별한 경력을 쌓는 일인데, 대학 교수가 된다거나 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냥 노래하고 음악인으로 살아가는 일에는 상관이 크게 없어요.”

그는 지금의 삶에 크게 만족하는 듯 보였다.

“노래 부르고 음악 듣고. 이런 일들이 곧 무대에 서기 위한 준비 작업이고 연습입니다. 마침 내가 다 좋아하는 것이니 일상이 즐겁죠. 67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니, 이 또한 멋지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아프지 않고 노래하는 게 제 바람이에요.(웃음)”

독일에 있어야 할 그가 이날 사천의 작은 무대에 올라 멋진 노래를 들려준 건 사실 그의 어머니 덕이다. 삼천포에 살고 있는 어머니 송정자(82) 여사를 뵈러 그는 해마다 여름이면 휴가를 이용해 한국을 찾는다. 또 사천을 찾는다. 그러다 4년 전 삼천포초 64회 동창회가 사천시문화예술회관에서 ‘이종궐 독창회’ 무대를 만들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와인갤러리 공연에도 참가하게 됐다.

“고향에 오면 그냥 좋아요. 옛날에 자주 가던 각산에도 오르고, 남일대에도 가 보고. 옛날에 비하면 풍경은 많이 변했죠. 큰 건물도 있고, 매립한 곳도 있고요.”

고향 삼천포에 대한 그의 인상은 아련한 듯 보였다.

“바이마르는 인구가 6만이 채 안 되는 도시예요. 삼천포 인구와 비슷하죠. 그런데도 국립 음대가 있고 국립극장이 있을 만큼 문화예술의 바탕이 강하죠. 제가 알기로 삼천포도 문화예술의 토양이 좋은 곳입니다. 비록 세계타악축제는 멈췄지만 크고 작은 공연이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는 50세 되는 해에 사천문예회관에서 기념공연을 갖고 싶다는 바람을 끝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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