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 이정 선생의 유적을 찾아서

▲ 구암 선생이 말년에 후학을 양성했던 구계서원 전경.

(강사 : 임학종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안동엔 퇴계, 사천엔 구암
한 달 남짓 넘도록 전국을 감염 공포에 빠뜨린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진주박물관이 운영하는 제12기 박물관대학에도 영향을 줬다. 3주간이나 휴강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그래서 6월 11일 예정됐던 ‘구암(龜巖) 이정(李楨) 선생의 유적을 찾아서’란 주제 강의는 7월 2일에야 마련됐다. 강의는 예정대로 국립진주박물관 임학종 학예연구실장이 맡았다.

흔히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가 좋다며 으스대는 과정에 이른 바 출세한 인물을 늘어놓곤 한다. 때론 읍면동장을 배출한 것도 큰 자랑거리인데, 중앙정부 고위 관료나 장군까지 배출했다면 더 말해서 뭣 하겠는가. 미뤄 짐작하기가 충분함이다.

시계를 좀 더 뒤로 맞추면 벼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학식과 덕망까지 고루 갖춰야 ‘인물’로 손꼽히곤 했다. 그럼 사천에선 누가 있을까? 고려 8대 임금인 현종이 있긴 하나 그는 유아시절에 잠시 머물렀을 뿐 사천사람이라 주장하기엔 다소 부족함이 있다. 그렇다면? 사천의 인물로 꼽는 으뜸은 단연 구암 이정 선생인 듯하다. 박물관대학에서 그를 강의 주제로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구암 이정 선생은 1512년 사천읍 구암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강이(剛而), 호가 구암(龜巖)이다. 그의 나이 12세에 하과(夏課)에 장원하고, 25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의 평균 나이가 30대 중반이었다고 하는데, 구암 선생은 장원급제까지 했으니 학식이 빼어난 천재였던 셈이다.

구암의 스승은 규암(圭巖) 송인수(宋麟壽) 선생이다. 그는 김안로의 폭정을 문제 삼다가 미움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어 왔는데, 구암이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다. 구암 선생은 당대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 남명 조식과 교유하며 높은 학식을 쌓았다.

그러나 이번 강의는 강의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사상과 학문을 이해하기보다 그의 유적을 쫓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신라 왕릉을 정비하다
구암 선생의 유적은 전국에 흩어져 있다. 이는 그의 관직과 관련이 깊다. 그는 장원급제 후 성균관전적에 임명됐다. 이듬해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이때 많은 서적을 가지고 들어와 퇴계 이황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예조정랑을 거친 뒤 부모 봉양을 위해 경상도 선산부사로 나갔다.

1553년엔 청주목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고 효행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1555년엔 왜구가 호남성에 침입하자 이를 무찔렀다. 1560년엔 경주부윤으로 나가 옛 신라 왕릉을 보수하고 옛 건물을 수리했다. 서악정사를 세워 후진 교육에도 힘썼다. 1563년엔 순천부사로 임명돼 갑자사화 때 사사된 김굉필을 위해 경현당을 건립, 그를 제사하게 했다. 1568년(선조1년)에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구암정사를 짓고 동쪽에는 거경재, 서쪽에는 명의재를 두어 후진 양성에 힘쓰다 1571년, 그의 나이 60세에 타계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도 경주 서악서원에는 부윤구암선생비, 순천에는 옥천서원묘정비와 임청대비가 남아 그의 공적을 기억하고 있다.
구계서원에는 구계서원기적비가 있어 구계서원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고, 뜰에 있는 구산사비(龜山祠碑)는 미수 허목 선생의 글씨로 새겨져 있어 가치가 더한다.

▲ 구암 선생의 묘소. 비석 앞 향로석은 옛 모습.

#사라진 향로석의 비애
구암 이정 선생의 묘는 처음엔 구계서원이 있는 만죽산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타계한지 21년 뒤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무덤이 도굴로 파헤쳐진다. 무슨 이유였을까? 같은 장소에 있던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는 멀쩡했는데도 말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구암 선생이 호남성에서 왜구를 무찌른 일과 연관시키기도 하고, 후손들 사이에선 임란 당시 진주성 함락이 어려워지자 그에 대한 분풀이였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어쨌거나 그의 묘는 1658년에 지금의 축동면 사다리와 경계지역인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 야산에 다시 쓰였다. 비석의 묘갈명 또한 미수 허목이 지었다. 허목은 개성이 고향이나 거창현감을 지낸 아버지로 인해 경상도와 인연을 맺었고, 20여년 머무는 동안 구암의 후손과도 교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학종 학예실장은 강의 말미에 안타까운 소식 하나를 덧붙였다. 구암 선생의 묘소 앞에 있던 향로석을 올해 1월 도난당했다는 거였다. 진주박물관 학예팀이 묘비 탁본을 마치고 마지막 촬영을 한 것이 1월 9일이고, 향로석이 사라졌음을 안 시점이 1월 17일이니 불과 며칠 사이에 일이 생긴 셈이다. 구암 선생의 후손들로선 땅을 칠 일이다. 마침 도난 등을 염려해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고 박물관 기증도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던 터라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

그런데 이 사건 수사를 맡고 있는 진주경찰의 태도를 보니 더 절망이다. 취재 결과, 사건 접수 6개월이 지나고 있건만 사건발생시기를 더 좁히지 못한 채 초기 신고인이 진술한 지난해 10월에서 올해 1월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만 파악하고 있었다. 사천 이 씨 문중에 양해를 구하고 도난 시기 직전까지 탁본과 촬영을 한 진주박물관의 일련의 활동을 여태 모르고 있다면, 이건 수사를 한 것인가 하지 않은 것인가!

▲ 구암 이정 선생 초상화.
▲ 구계서원에 있는 구산사비.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