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진주박물관-뉴스사천 공동기획] 사천, 그 3000년의 시간을 더듬다

국립진주박물관이 4월 16일부터 7월 9일까지 제12기 박물관대학을 운영한다. 주제는 ‘사천(泗川)’이다. 본촌리 유적과 이금동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사천 3000년의 역사를 아우른다. 뉴스사천은 박물관의 협조로 강의내용을 정리해 지면에 옮긴다.(편집자주)

 
 
 
   
▲ 1000년 전 현종의 아버지 욱이 이 길을 걸었을까. 고자치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 하나 없이 각종 경고 글귀만 눈에 들어온다.
 

(강사 : 최헌섭 재단법인두류문화연구원장)
우리가 길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하는 말이 있다.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중국 소설가 루쉰이 그의 작품 ‘고향’에서 언급한 말이다. 조선시대 서산대사도 명언을 남겼다. “눈 덮인 길을 걸을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후대인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앞글은 길을 희망에 비유해 표현한 것이고, 뒷글은 말과 행동에 있어 신중하란 뜻이 담겨 있다. 숨은 뜻이 조금은 달라 보이지만 길의 속성을 제대로 담았다는 점에서 대중으로부터 널리 공감을 얻는 모양이다. 누군가가 남긴 흔적을 쫓아 내가 가고, 그 다음에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따른다면 그것이 곧 길인 셈이다.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직립보행을 시작한 인간은 10만여 년 전부터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오모 계곡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졌다. 목적지를 정하고 떠났다기보다 먹이를 찾아 옮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들 호모 사피엔스는 6만7000년 전 중국으로 들어왔고 그 중 일부는 한반도까지 이동했을 것이란 연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길로 인정받는 것은 전북 진안의 여의곡유적으로, 청동기시대에 고인돌의 상석을 운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고인돌이라면 사천에도 결코 적지 않으니 우리가 모르는 그 옛날 길이 어딘가 낯을 가리고 있을 터이다.


고려시대-현종과 부자상봉 길
사천의 옛길을 얘기함에 있어 고려 현종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 8대 왕 현종의 아버지 왕욱(王郁)이 5대 왕 경종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비 헌정왕후와 사통한 죄로 사천으로 유배 온 사건이 있었다. 출산 과정에서 왕후가 죽자 6대 왕 성종은 욱의 아들 순(詢)을 아버지가 있는 사천으로 보낸다. 하지만 아비와 아들을 서로 떨어져 있게 했으니, 아비는 귀룡동에 아들은 배방사에 머물렀다. 떨어진 거리가 여러 시간을 걸어야 할 만큼 멀었음에도 아비 욱은 아들을 만나기 위해 5년째 왕복했다. 그리고 돌아갈 땐 꼭 산마루에서 멀리 아들이 있는 배방사를 바라보며 눈물지었다고 하니, 부자지간 애틋한 정이 이보다 더 서린 길이 있을까. 그 고갯마루를 고자치(顧子峙)라 부르고 고개 아랫마을을 고자실이라 불렀다. 고자치는 정동면 고자실(지금의 학촌)마을과 사남면 능화마을을 잇는다. 사천시사에는 귀룡동이 사남면 화전리나 우천리, 배방사는 정동면 장산리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불행히도 왕욱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지극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아들 순은 8대 왕(현종)에 오르게 된다. 현종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천현을 격상시켜 사주(泗州)라 이름지었고, 이로 인해 사천은 ‘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별칭을 얻게 됐다.
그런데 왕욱은 왜 하필 사천으로 왔을까? 이에 대한 실마리를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장의 설명에서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다. “당시 죄인에게 유배형을 내릴 때는 수도(=개경)로부터 삼천리 이상 떨어지게 했다. 그리고 왕욱이 유배를 떠나던 992년, 성종은 전국 60개의 포구를 선정해 일정한 운송비용을 매기는 ‘60포제’를 시행하는데 그 중 하나가 통조포(通潮浦)이다.” 통조포는 이후 통양창으로 불린 곳으로 지금의 용현면 선진리에 위치한 곳이다. 왕욱과 순이 시차를 두고 배를 이용해 사천까지 내려왔는지 알 순 없으나 당시 육상교통망인 22역제는 현종 시기에 이르러 체계가 성립했다. 천 년 전 사천의 길 얘기다.

▲ 해동지도에 표현된 사천현(조선시대)

조선시대-통영별로를 따라 걷다
고려시대에 다니던 길이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바뀌었을까? 아마도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22역도 체제에서 사천의 교통망은 산남도(山南道)에 편제됐다. 이 길은 전주-진안-거창-산청-단성-진주를 거쳐 사천 관율역(두량리 관율마을)에 이어졌다. 이는 다시 하동, 남해, 고성, 거제 등으로 뻗어나갔다. 역사 속의 이 길은 백제와 가야, 백제와 신라 사이의 치열한 전장이기도 했다.

산남도는 조선에 이르러 소촌도(召村道)로 이름을 바꾼다. 사천 사주리에 있던 동계역은 남해로 연결하는 주요 길목이었다.
그리고 전주에서 출발해 진주와 사천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가 있던 통영까지 이어지는 관로를 통영별로라 불렀는데, 이순신 장군의 장계를 품은 숨 가쁜 파발마도 이 길을 지났으리라.

사천의 초입엔 열물다리(十水橋)가 있었다. 이 다리는 중선포천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바다가 열물이 되어 수위가 차면 이곳까지 배가 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십수교 아래로는 장암나루가 있었는데, 구암 이정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사천만과 섬진강을 거쳐 하동 지리산 일대를 유람했다.
사천읍 중심에는 사천읍성이 있다. 원래 사천현의 치소는 읍성의 남쪽 고읍마을에 있었으나 세종 24년(144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성 안 샘과 우물 세 곳은 겨울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도 시민들이 애용하는 약수터로 남아있다. 그러나 사천읍성의 원형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일부를 복원하긴 했으나 미흡하거나 부실하다는 비판도 따른다.

통영별로는 사천읍성을 지나 풍정-한실숲-몽대-만마-가메바우-객방으로 이어진다. 고개마다 모퉁이마다 숨어 있는 이야기가 솔깃하다. 물론 그 중엔 현종에 얽힌 부자상봉의 길도 들어 있다. 강의 말미에 최 원장이 책을 덮으며 제안했다. “요즘 자식들 일이라면 부모들 발 벗고 나서잖아요. 이럴 때 현종에 얽힌 유래 들려주며 ‘자식들 발복 위해 걸어보세요~’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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