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 정희진 저 | 교양인,
"나의 실천 대상 범위는 기껏해야 나 자신이다. 여기서 '나'는 사회와 대립되는, 동떨어진, 독자적인 개인이 아니라, 변화의 시작 지점인 '나'이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서로에게 굴복당하거나 서로를 선택하는 자아들의 연속체다. 삶은 언제나 막다른 그러나 꺾어진 골목과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고유한 생물학적인 몸이 아니라, 물이 끓듯 매순간 의미를 생성하고 휘발하는 격렬한 투쟁의 장소이며 외부와 구별될 수 없는 존재(social body)이다. 사회가 내게 '각인'하는 것, 이에 대한 나의 수용, 저항, 협상, 반응 사이에 내가 존재한다. 바다 위에서 세상을 보면 인간은 서로 상관없이 각자의 섬에 살지만, 바다 밑에서 보면 섬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몸은 세상과 타인에게 열려 있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276-7


얼마 전, 내가 쓴 글을 읽어주던 중 한 친구가 나더러 "너도 정희진처럼 써봐~ <페미니즘의 도전> 봤어?"라는 비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아주 훌륭한 작가 중 한 명으로 내가 섬기는 정희진 선생님‘처럼’이라, 상상할 수 있는 미래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성 싶었지만, 생각난 김에 오랫만에 책장에서 이 책을 꺼냈다. 낡은 책의 먼지를 닦고 펼치다 덤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페미니스트’로 살기 시작한 내 인생의 페미니즘 역사가, 대학 이후에 시작된 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첫 장엔 ‘2005년 12월 2일’이란 날짜와 함께 내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난 이미 이 책을 샀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읽으며 토론했었다. 다시 책을 훑어보니 그 시절의 난 꽤 열심히 줄 쳐가며 공부했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오래된 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 뿐 아닌 수많은 젊은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즘 역사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난 “안다는 건 상처받는 것”이라는, 아프지만 또 한편 강렬한 지식과 ‘앎’에의 진실을 배웠다. 이후로 나는 상처받더라도 가리어진 것들을 알고 배워가는 것, 모든 투쟁은 그 자신의 영역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아주 명징하고도 분명한 사실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급진 페미니스트’됨을 목표로 하는 내게,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해방’ 사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를 깨고 나오기, 해체하기, 자신이 몸담은 사회의 권력 구조를 직시하고 폭로하기, 중심으로부터 부단히 변방으로, 경계로 눈과 몸을 옮겨가기 등 다양한 소주제를 포함한다.

누구에게든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 자신이 선 자리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또한 가장 고통스러운 일 역시 자기를 아는 일이다. 여성들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뼛 속까지 여성을 깊이 혐오하는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이러한 사회를 직시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페미니즘이 오독되고, 멸시받으며 “모든 게 이상한 여자들의 페미니즘 때문”이라는 어긋난 불평을 듣는 일은, 때로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다”라는 주문을 몇 번을 외워야 극복이 가능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게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는 이들이라면, 이 책도 꼭 한 번은 읽어보길 권유하고 싶다. 물론 이런 ‘상처받는 일’을 감행할 용기있는 이는 극히 드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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