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진주박물관-뉴스사천 공동기획] 사천, 그 3000년의 시간을 더듬다
② 청동기시대 삶과 죽음 보여주는 ‘이금동고인돌’

1998년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 예정지(이금동 배고개)에서 이금동고인돌 유적지 발굴조사 모습
국립진주박물관이 4월 16일부터 7월 9일까지 제12기 박물관대학을 운영한다. 주제는 ‘사천(泗川)’이다. 본촌리 유적과 이금동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사천 3000년의 역사를 아우른다. 뉴스사천은 박물관의 협조로 강의내용을 정리해 지면에 옮긴다.(편집자주)

(강사 : 중부고고학연구소 윤호필 자문위원) 와룡산 남쪽 기슭, 궁지동 너른 들판과 그 너머 향촌 앞바다를 굽어보는 곳. 행정동으론 향촌동, 법정동으론 이금동에 속하는 금암마을 뒤 언덕에는 항공인력의 산실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옛 항공기능대학)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만 년 전 구석기대에도 그곳엔 누군가 살았고,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이금동 땅은 앞 세대의 많은 기억을 저장하고 있었다. 그 기억을 일깨우는 계기가 바로 항공기능대학이었다.

이금동 일대는 예로부터 ‘바위들’이라 불릴 만큼 고인돌의 존재가 알려졌던 곳이다. 그러던 중 1995년 경남대학교박물관이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해 이 일대 고인돌 분포양상을 대략 확인했다. 같은 해 항공기능대학 설립계획이 확정되고 이곳이 부지로 확정되면서 본격적인 시굴조사와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그 과정에 ‘바위들’의 숨은 역사가 드러났다.

조사는 (사)경남고고학연구소(현 재단법인삼강문화재연구원)이 맡았다. 조사 결과 자갈돌주먹도끼와 흑요석제박편 등 구석기시대 유물 10여 점이 출토돼 이곳이 구석기기대 문화층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후 세대 사람들로 인해 구석기의 흔적은 대부분 훼손됐고, 고인돌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삶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만 해도 3000년의 시간은 족히 되고도 남음이다. 그 기억은 불과 땅속 10cm 아래 잠들어 있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사천에서 고인돌 유적이 발견되는 곳은 주로 와룡산 자락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 개의 상석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는 게 특징인데, 그 대표적 사례가 이금동유적이다. 처음 지표조사에서는 3개의 상석만 확인됐으나 발굴조사 과정에서 3~4열로 늘어선 무덤이 75기나 발견돼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와룡산 자락 고인돌에 일정한 배치양상이 있음을 발견한 고고학자들은 이곳 고인돌이 무덤 기능뿐 아니라 더 다양한 목적으로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주거지와 배치관계를 고려하고, 나아가 지리적‧지형적 양상을 고려해 묘표석, 제단, 의례, 교통로 표시, 마을경계 등으로 사용했을 것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고인돌의 가장 기본적 기능은 무덤이다. 고인돌의 기본구조는 상석-지석-묘역-매장주체부로 나눌 수 있다. 매장주체부란 시신을 보관하는 곳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위치에 따라 지상식 고인돌과 지하식 고인돌로 나뉜다. 그밖에 상석의 형태나 지석의 유무, 묘역의 설치 등에 따라 다양한 형식 분류가 이뤄진다.

이금동고인돌은 상석-묘역-매장주체부 구조다. 땅 위로는 지석(받침돌) 없이 상석(덮개돌)만 얹었다. 그러나 상석이 없는 무덤도 많은데, 대체로 후대에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주체부는 석축석관, 상형석관, 목관, 토광으로 다양했다.
이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는 그곳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연관 지어 살필 수 있는데, 일부 청동기 전기의 유물이 발견된 고인돌도 있지만 BC6~4세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대체로 매장주체부에서 발견됐는데, 마제석검, 적색마연토기, 채문토기, 비파형동검, 관옥 등이 주를 이뤘다. 묘역에서는 무문토기편과 석기 파손편이 다량 출토됐다.

삶과 죽음의 공간을 한눈에
이금동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삶과 죽음의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수십 기의 고인돌이 무리를 지어 발견된 곳 그 북쪽 산기슭 방향에서 수많은 집자리가 확인됐는데, 이는 곧 마을과 아주 가까운 곳에 공동묘지를 두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금동고인돌 출토 환옥 및 관옥
이금동고인돌 유적 출토 비파형동금(재가공품)
이금동유적 출토 가지문토기와 적색마연토기
나아가 삶과 죽음의 공간 사이에서 2개의 대형 지상건물터가 발견됐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아마도 신전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지상건물터는 생활공간인 주거지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장묘공간인 고인돌 유적 사이에 위치했다. 어쩌면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을 나누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신전으로 사용했을 것이란 추측도 나온다. 학자들은 이곳에서 출토된 붉은간토기, 바리형민토기 등이 제의(祭儀)적 성격을 가졌다고 보고 장송의례가 이뤄졌던 곳으로 판단한다.

건물터의 규모도 관심사다. 하나는 길이 29m에 폭이 7m로 정면 13칸, 측면 2칸 건물로 추정된다. 다른 하나는 규모가 더 커서 길이 32m, 폭 12m 정도다. 건물기둥 자리가 200개가 넘고 그 지름이 최대 1m에 이른다니 그 당시의 건축기술 또한 미뤄 짐작함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대략 3000년 전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와룡산 남쪽 이금동 일대에서 풍부한 산림자원과 수자원을 바탕으로 대규모 취락을 형성해 살았다. 돌을 잘 다뤘을 뿐 아니라 청동기문화도 꽃피웠다.

중부고고학연구소 윤호필 자문위원은 이금동유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집자리, 광장, 무덤군, 대형의 지상건물지 등 청동기시대 마을의 구조와 생활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