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섬마을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을 때다. 상치과목으로 ‘도덕’을 맡고 있었는데 도덕수업이란 그렇고 그런 내용이라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재미없으려면 한없이 맥 빠지는 시간이다. 그래서 날씨가 좋은 날이면 양지바른 뒷동산으로 아이들을 데려나가 토론수업을 시켰다. 그날의 토론 과제는 ‘우리 집 가훈’ 발표였다. 예나 지금이나 가훈이 있는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가훈’을 놓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 이야기를 한 번 해 보라는 뜻이다.

예상대로 아이들이 제시한 가훈은 대부분 유비무환(有備無患),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따위였다. 학생들은 부모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그런데 민수란 아이가 쭈뼛쭈뼛하면서 가훈발표를 망설이고 있다. 그래도 채근을 하니 꼬깃꼬깃해진 쪽지 한 장을 호주머니에서 끄집어내는데 땀에 절어 있다. 긴장 때문에 아이의 손에 땀이 차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 가훈은 지금까지 없었는데, 이번에 정했어요. ‘쓴 물건 제자리 갖다놓기’입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웃음꽃이 빵 터져 버렸고, 민수는 새빨갛게 얼굴이 물들었다. 민수 집에서 그 것을 가훈으로 한 사연은 이렇다. 섬 마을 사정이 그렇듯이 몇 해 전 바다 일 나간 민수 아버지는 바다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 혼자 몸으로 자식들을 키우는데 무슨 가훈 만들 여력이 있었으랴, 아이가 그래도 자꾸 졸라대니,

“아이고, 무슨 놈의 선생이 고따위 숙제를 내더냐? 가훈이란 아무튼 집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제? 난 너희들이 쓴 물건만이라도 제 자리에 갖다 놓았으면 좋겠다, 제발!”

“그럼, 엄마, 우리 집 가훈은 ‘쓴 물건 제자리 갖다놓기’로 할까?”

“그래, 그래. 그렇게 하자. 이제부터 우리 집 가훈은 쓴 물건 제 자리 갖다 놓기다.”

민수는 솔직히 이야기했지만 놀림거리가 되게 되었다. 이런 경우 교사가 살짝 개입해야한다.

“민수의 발표는 참 좋았어요. 토론에 있어 가장 소중한 자세는 멋들어진 장황한 말이 아니라 솔직하고 정직한 의견을 내는 것이에요.”
아이들은 가훈들을 놓고 토론을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화만사성 같은 목표도 좋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집안이 화평할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그래, 맞다. 나도 집에서 물건을 아무데나 두어서 항상 혼이 나곤하거든.”

아이들은 훌륭했다. 난상토론 끝에 가장 훌륭한 가훈으로 ‘쓴 물건 제자리 갖다 놓기!’로 결정했다. 그 해 한 해 동안 그 학급의 모범 가훈으로 민수 네의 가훈이 걸려있었다.

12월에는 한 해를 곱씹어보게 된다.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며 허황하고 관념적인 목표만 설정하고 허송세월을 하였는가 하는 후회 속에서 ‘목표보다 실천과정’이 중요하다고 결의했던 옛날 섬마을 아이들이 문득 생각났다.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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