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당시 우리 모임에는 김진경, 조영옥, 도종환 등등 이름 있는 시인들이 제법 많이 포진되어 있었다. 시인은 맑은 영혼을 지닌 존재라 불의를 참아내지 못했다. 서정시 대신 격문을 썼으며 아름다운 시심을 노래하던 입으로 민중의 아픈 신음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꺼이 선두에 서서 저항운동에 동참했고 당연히 학교에서 내 쫓겼다. 어느 날 취흥이 돋아 순진무구한 이 시인들을 은근히 놀려주고 싶었다.

“김 시인, 앞으로 날 계관시인이라고 불러 줘요! 내 시를 읽고 사연을 듣고 보면 인정할 걸.”

“이 선생이 언제부터 시를 썼나?”

계관시인이라는 직책은 1616년 영국의 제임스 1세가 시인 벤 존슨에게 연금을 준 데서 시작되었다는데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계관시인이란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안다. 계관시인이란 시인중의 시인이라 보면 된다. 제법 비장하게 한 숨을 푹 내쉬며 설명한 사연은 이렇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총각이셨는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요. 그래서 국어시간에 심심찮게 과제를 내어 주고는 선생님은 혼자서 무엇인가를 쓰고 또 지우고를 하곤 했어요. 아마도 연애편지였을 거야. 아무튼 그 분은 수업 대신 청춘사업을 하였다고나 할까. 우리는 그저 좋았죠, 수업안하니. 그날도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더니만 칠판에 ‘이삭’이란 낱말을 크게 적고는 작문을 하라고 하더군. 일종의 시제(時題)가 주어진 셈이지.”

난 그 화두를 부여잡고 깊은 고뇌에 고심을 거듭하는데, 순간 머리를 찡하게 울리는 무엇인가가 확 떠올랐다. 그래서 단숨에 일필휘지로 원고지에 옮겼다. ‘주워야지!’ 요즈음은 ‘이삭줍기’란 낱말은 그저 자투리 이익이나, 과외 수입 정도를 비유하는 숙어이지만 당시에는 실제 상황이었다. 추수가 끝나면 당연히 이삭줍기에 나섰고 이 일은 주로 아이들의 몫이었기에 이삭이란 시제를 받는 순간 ‘이삭은 주워야 한다.’ 라는 생각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다음 시간에 당연히 내가 호명되었지. 난 사실 좀 우쭐했지. 당연히 촌철살인의 내 절창에 대해 국어 선생님의 극찬까지는 아니라도 머리는 쓰다듬어줄 줄 알았지. 그런데, 나가자 마자 ‘오소리 개 뺨치듯이’ 때리는 것이야, 한 시간 내내 고작 그 한 줄 썼냐고 말이지. 그 때 알았어. 시인은 탄압받는 존재란 것을, 그 길로 난 붓을 꺾었어!”

그 사연을 듣고 시인들은 박장대소하고 다 계관시인으로 인정했는데 딱 한 명,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시인 한 명만큼은 나를 끝까지 시인으로 부르지 않았다. 도종환 시인이다. 의정활동에 바쁘면서도 미련하리만치 시를 놓지 않았고 지난달에 제1회 신석정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풍은 다 지고 가을이 깊어 갈수록 시심은 저절로 솟아나는 계절, 문득 그래도 젊었던 그 시절, 그 시인들이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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