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인상주의 미술의 또 다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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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인상주의 미술의 또 다른 풍경
  • 김준식 객원기자
  • 승인 2014.08.1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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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Liebermann의 언덕위의 노파와 염소(Frau mit Geissen in den dunen) 1890

▲ Max Liebermann의 언덕위의 노파와 염소(Frau mit Geissen in den dunen) 1890
황량해 보이는 언덕에 염소 두 마리가 있다. 그 중 한 마리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에게 줄에 목이 감겨 있지만 웬일인지 여자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려하는 모양새다. 화면은 매우 단조롭다. 이 장면을 설명할 아무런 장치도 없고 단지 여자와 두 마리의 염소뿐이다. 서민들의 일상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일수도 있고 뭔가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길 끝에는 곧장 하늘이 연결되는 지평선이다. 아마도 한 참을 걸어가야 될 지도 모른다.

막스 리베르만은 베를린 출생이다. 섬유업을 하다가 은행업을 하게 되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리베르만은 브란덴부르크 문 주위에서 살았다. 많은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처음에는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미술에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1869년 그의 나이 22세 때 바이마르미술학교에 입학하여 회화와 드로잉을 공부하게 된다. 그 뒤 그는 파리와 네덜란드 등을 여행하며 당시 유행하던 파리의 퐁타방파(인상주의)의 그림을 보게 된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한 리베르만은 잠시 의사로도 복무하게 된다.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신체와 동물 묘사에서 그의 의사 경험은 세부적 근육의 묘사로 잘 나타난다.

인상주의 미술의 특징은 전통적인 그림의 주제와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그림의 동기와 대상을 찾는 것이다. 즉 이전의 미적 기준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화가 개인의 내적 감흥에 바탕을 둔 그림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아무런 미적 감흥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아마도 이 그림으로부터 어떠한 미적인 감흥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상주의 미술이 가진 최대의 강점이자 약점일 수 있다.

염소를 끌고 있는 노파와 끌림을 당하는 염소,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염소, 지평선과 마주하고 있는 넓은 초원이 이 그림의 전부다. 심지어 노파는 얼굴조차 돌리고 있어 그녀의 표정을 통한 어떤 사실의 추론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른 관점으로 이 그림을 읽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철학적인 접근이다. 왜냐하면 화가는 철학을 그림보다 먼저 공부했으므로 이 그림의 바닥에 흐르고 있는 철학적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두 마리의 염소를 보자! 한 마리는 주인에 의해 끌림을 당하고 있지만 그 끌림의 반대반향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하지만 결국 주인인 노파에 의해 끌려 갈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독일의 철학적 사조를 지배했던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적 해석이 가능하다. 즉, 주인과 노예의 도덕으로 이 상황을 볼 수 있다. 주인의 도덕은 미래에 대한 확신과 미래에 대한 보증, 그리고 창조력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방향으로 모든 것을 이끈다. 즉 노파는 주인으로서 염소를 노파의 방향으로 끌고 갈 당위가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노예의 도덕은 비현실적이며 이상적이다. 따라서 염소는 주인이 끄는 방향의 반대로 머리를 돌리고 있기는 하지만 뚜렷하게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의지가 있어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또 한 마리의 염소(이미 노파와 같은 방향으로 돌아 선)는 주인에게 이미 동화된 노예로서 그나마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노예보다도 뒷모습이 더욱 쓸쓸하다.

니체의 의하면 강자에게 선이란,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며, ‘자신에게 활력을 주고 자신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강자에게 악이란, ‘나약하고 소심하며 순종적’인 것이다. 강자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이라고 부르며, 자신에게 나쁜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약자의 도덕은 강자의 도덕과 정반대이다. 약자에게 ‘악’이란 자신을 지배하는 주인의 모든 것이다.

이 그림에서 노파는 강자다. 당연히 염소는 약자다. 노파가 가려고 하는 방향이 ‘선’일 수밖에 없다. 약자에게 ‘선’ 오직 자신뿐이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악’과의 균형을 맞출 수가 없다. 따라서 노예는 스스로를 용서해버린다. 왜냐하면 절대 ‘악’ 때문에 내부적으로 생긴 복수심과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무력감이 노예를 자발적 용서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염소는 노파를 따라 노파의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대한 용서’라고 생각하며 자족해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그 강자가 가려고 하는 ‘선’의 방향에 종착점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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