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흐의 슈마드리바흐 폭포(Der Schmadribachfall) 1822

요셉 안톤 코흐(Joseph Anton Koch)는 1768년 오스트리아 티롤지방의 엘비게날프(Elbigenalp)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를 티롤의 화가라고 부른다. 코흐는 양치기로서 삶을 살다가 주교 Umgelder의 추천으로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칼스슐레(Karlsschule)를 다녔다.

하지만 칼스슐레는 사관학교와 같은 엄격한 규율의 학교였기 때문에 코흐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에서 도망쳐 프랑스와 스위스를 여행하고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다.

이 시기에 코흐는 독일 신고전주의 작가인 카스텐스(Asmus Jacob Carstens)를 만나게 되면서 영웅적 회화와 접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영향은 코흐의 삶 전체와 그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00년이 되면서 코흐는 풍경화가로 발전하게 되는데 특별히 그는 영웅적 풍경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영웅적 풍경화’란 기존의 프랑스 풍경화가인 니콜라스 푸쌩(Nicolas Poussin)이나 클로드 로레인(Claude Lorrain)이 그렸던 목가적 풍경이나 성서적 모티브의 풍경화와는 달리, 경이로운 바위가 위용을 자랑하는 험준한 알프스 산악지형과 그곳의 거대한 폭포를 배경으로 하고 상대적으로 위약(危弱)한 인간을 그려 넣어 자연을 영웅처럼 추켜세우는 방식의 풍경화를 말한다.

이 그림, 슈마드리바흐(Schmadribach) 폭포는 실제로 스위스 베른주(州) 라우터브루넨의 슈테첼베르크(Stechelberg)에 있는 폭포로서 라우터브루넨 계곡에 있는 30여 개의 폭포 중 하나이다. 슈마드리천(川)에 의해 형성되는 말꼬리형(horsetail) 폭포로 총높이는 300m, 막힘없이 낙하하는 최대 높이는 250m이다.

슈마드리천이 큰 빙하에서 발원하므로 1년 내내 많은 물이 쏟아져 내린다. 코흐는 이 장엄한 폭포를 몇 장의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 그림은 그 그림들 중 하나이다.

‘영웅적 풍경화’가 탄생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12년 코흐는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침공(나폴레옹 군)을 항의하여 로마를 떠나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 코흐는 지금까지의 고전적 풍경화가 가지는 목가적이고 성서를 모티브로 하는 비현실적 풍경화로부터 살아 움직이며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탈고전적 테마를 융합하게 된다. 거기다가 독일 풍경화의 거친 자연 묘사를 부가하여 코흐의 영웅적 풍경화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도 성서를 기본으로 하는 그림을 여러 편 남겼다.

거대한 빙하로부터 녹아 나오는 엄청난 양의 물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광경은 우리에게는 언제나 압도적인 풍경일 수밖에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폭포의 엄청난 풍경과 거대한 소리는 많은 예술가들의 예술혼을 자극하였다.

동양의 문학작품으로는 이태백이 지은 ‘망여산 폭포’ 가 유명하고 회화로는 우리나라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가 바로 자연경관, 특히 폭포에 대한 경배를 나타낸 그림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코흐의 폭포 그림은 좀 더 위압적이고 사실적이어서 그들이 생각하는 자연과 동양인이 생각하는 자연은 매우 다른 존재임을 우리는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코흐는 로마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거기서 많은 로마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독일의 풍경화가들 중 로마에 유학 온 이들에게 예술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그를 독일 낭만파 풍경화의 시작점으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이 위대한 화가도 노년은 가난과 싸웠으며 타국의 로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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