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수출 성사 위한 업무수행” 대 “꼬리 내리기”

김홍경 사장
‘지분매각설’로 직원 1000여명이 상경집회에 나서는 등 요즘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분위기가 흉흉하다. 이런 가운데 KAI의 총 지휘자라 할 수 있는 김홍경 사장이 며칠 째 자리를 비우면서 KAI 직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추측들이 오가고 있다.

24일 KAI에 따르면 김 사장은 최근 이탈리아와 경쟁하고 있는 ‘싱가포르 계약’ 건과 관련해 미국을 방문하고 있다. 지난 21일 출국했으며, 26일 귀국 예정이다.

이번 ‘싱가포르 계약’은 항공기를 직접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비행교육훈련’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KAI는 항공기를 제공하고, 록히드마틴사는 비행기술을 가르치기로 하는 등 공동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김 사장의 이번 미국 방문은 ‘UAE 수출’ 좌절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서, 록히드마틴사 측의 협조를 구하기 위함이라는 게 KAI 쪽 설명이다.

그러나 KAI 내부에서는 이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한마디로 회사가 비상상황인데 CEO가 자리를 비우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익명의 KAI 관계자는 “싱가포르 수출 건은 해당부서에서 충분히 챙길 수 있는 것인데 굳이 직접 나간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직원들 사이에는 정부나 청와대 압박이 심해지니까 피한 것 아니냐는 의심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사실상 정부의 낙점을 받아 (KAI사장으로)온 만큼 눈치를 보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라며 불만을 털어놨다.

대한항공의 KAI 인수 움직임에 반발해 노조원과 비노조원이 함께 비상투쟁위원회를 출범하는 장면(4월7일)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난 20일 상경집회를 앞두고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상경집회 자제협조공문을 노조에 보내고 팀장급들에게는 아예 참가하지 말라는 압력도 보냈다는 것이다.

또 이날 상경집회가 몇몇 언론들을 빼고는 보도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관계자는 추측했다. “지역에서 1000여명이 상경해 집회를 열 때는 관심을 끌려는 게 목적인데 적어도 적극 알리지 않았거나 보도자제 요청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한 방송사 관계자는 “지난 20일 보도자제를 바라는 협조요청을 받은 바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나서서 ‘노조를 부추기는 CEO가 있다’고 하니까 몸을 사리는 것 아니겠냐”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8일 ‘공공기관 선진화 추진점검 워크숍’에서 공기업선진화 대상을 포함한 기업들을 향해 경고성 발언을 했다.

“(공기업 개혁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국회에 로비를 하는 노조도 있고, 이것을 은근히 부추기는 CEO도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이 발언으로부터 KAI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KAI 안팎의 보편적 시각이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눈치 보기가 심해졌다는 게 김 사장을 비판하는 이들의 목소리다.

20일 산업은행 본사 앞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KAI 직원 1000여명이 버스를 이용해 회사를 빠져나가는 모습
반면 “이번 미국 방문은 예전부터 잡혀 있던 것”이라며 김 사장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KAI 한 관계자는 “지분 매각이란 악재가 있다 해도 싱가포르 수출은 회사로 볼 때 중차대한 문제다. 당연한 업무수행을 삐딱하게 보는 것은 괜한 트집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KAI 사장으로서 정부에 밉보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직원들의 뜻과 다르다고 생각지 않는다”라며 무한한 신뢰를 보내기도 했다.

KAI노조 박한배 위원장도 이런 의견에 동의했다. “사장을 비롯해 회사경영진이 눈치를 심하게 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은 이해해 줄 수 있는 수준이다. 만약 어느 정도를 벗어나면 노조와 비상투쟁위원회 이름으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산업은행과 두산인프라코어의 지분 매각 방침이 알려지고, 이를 대한항공에서 사들일 의사를 밝히면서 KAI에는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느껴진다. 지난 20,21일에는 싱가포르 실사단이 KAI를 방문해 현장을 확인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 자리에서 KAI의 완전 민영화에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는 얘기도 들리고 계약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뜻이 산업은행에 전달됐다는 얘기도 들린다.

무성한 추측과 소문들 속에 KAI 관계자들의 걱정이 다소 지나쳐 보이기도 하지만 김 사장의 이번 미국 방문이 ‘오얏나무 아래서 갓 끈을 고쳐 매는 격’은 될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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