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반, 당시 청소년들에게는 출입금지 구역이 참 많았다. 술집, 다방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당구장, 영화관, 심지어는 빵집까지도 마음 놓고 들어 갈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그저 교실에서 ‘가만히 있어라!’고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폭력이 동반된 가차 없는 징벌이 따랐다.

한 순간도 쉼 없이 몸이 커지고 마음은 바다의 너울같이 울렁이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닌가?

우리는 항상 일탈을 꿈꾸었고 또 끊임없이 시도했는데 가장 인기 있는 ‘금지된 장난’은 ‘영화 보기’였다. 아이들은 징계를 각오하고 영화 보기를 감행했고, 자기 돈을 내고 보면서도 학교 당국 몰래 가서 본다고 해서 ‘도둑 영화’본다고 했다. 가뭄에 콩 나듯이 합법적인(?) 영화 관람이 있기는 했다.

기말 고사가 끝날 때쯤 일 년에 한 두 차례 단체 관람을 학교 교사들의 통제 하에 허용되는 것이다.

그 정도로는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는 태부족이어서 교무실 학생부에는 도둑 영화 보다 걸린 아이들이 줄줄이 꿇어 앉아 조사 받는 광경은 매일의 일상사였다.

새로운 학생 주임 선생님이 전근해 오시면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 선생님은 국문법 담당이었는데 과목도 딱딱하지만 수업 방식도 고리타분하여 점심시간 직후인 오후 첫째 시간이라도 걸리는 날이면 죽을 지경이었다.

폭포마냥 쏟아지는 잠을 이길 장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완고하기 짝이 없어 보이던 학생 주임이 엉뚱하게도 학기 시작 첫 전교 학생회 때 학생 대표들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고 그에 대한 응답을 찾는데 우리는 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학교에 딱 한 가지만 건의 한다면 무엇일까? 그 한 가지만은 내가 해결하마!”
“저희들은 좀 더 많이 영화 단체 관람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문화에 목이 마릅니다!”

우리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학생 주임선생님은 약속을 지켰다. 그야말로 폭탄선언에 가깝게 학내 규정이 바뀌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지정된 영화관에 한하여 영화를 마음대로 보아도 좋다는 선언이었다. 엄청난 파격이었다. 우리 학생들은 다들 날라갈듯이 환호작약했고 금지된 공간이 열리는 해방감을 만끽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행 첫 주에는 전교생이 다 관람했는데 2-3주 지나면서 그 수가 급감하여 영화관 측에서 볼멘소리를 할 지경이었다. 단체 관람으로 반값으로 보는 학생들과 온 값으로 도둑영화 보던 학생 수와 비슷해져 버렸으니. 영화 보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규제 완화’가 성공한 것이다.

규제 완화가 그렇다고 만병통치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적절한 규제는 오히려 강화해야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규제완화 차원에서 시행한 선령완화가 세월 호 참사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년 적령에서 30년으로 연한을 연장하니 옳다구나 하고 18년이나 된 노후한 선박을 수입해 왔고 그 배가 참사를 낸 것이다.

그 어떤 복지보다 우선 하는 것이 국민의 안전이다. 어떤 이들은 경제와 안전을 동등하게 여기기도 한다. 웃기는 일이다. 생명을 잃으면 그 순간 온 우주를 잃은 것이다.

교통사고라도 당해서 가족이라도 잃어 봐라! 돈이 눈에 보이겠냐? 명예와 권력이 탐이 날것인가? 1999년 시월드 참사에 첫째를 잃고 훈장을 반납하고 이민을 떠나버린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의 한 어머니의 절규를 상기하자.

“이 나라에 대한 기대는 접었다. 둘째라도 안전하게 키워야겠다, 비록 힘들고 가난하더라도!”

이제 선거는 끝났다. 고된 과정을 거친 당선자들 모두에게 축하드린다. 또한 당부한다. 제발 지역민들의 안전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여 시정을 펼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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