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 愛 빠질 만한 이야기 - 32

▲ 농기구 키를 닮은 대곡마을의 지세.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는 애국가, 국기는 태극기(太極旗), 국화(國花)는 무궁화입니다. 그렇다면 국목(國木)은? 국조(國鳥)는? ‘정답은 없다!’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국목과 국조에 대해 규정한 법률이 없거든요.

그러나 “남산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애국가 구절 때문에 소나무를 제일 먼저 연상하고 있고 딱히 정하지 않아도 다들 소나무라고 생각을 하죠. 무궁화도 원래 누군가 일개인이 정한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무궁화 삼천리’라는 말처럼 널리 쓰다가 정해졌습니다.

소나무는 이렇듯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그 푸르른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몇몇 지역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천읍에서 33번 국도를 타고 고성방향으로 5분만 달리면 나오는, (사)생명의숲국민운동과 산림청이 주최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당당하게 대상을 차지한 정동면 대곡마을의 대곡숲입니다.

대곡마을 숲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대해서 반드시 언급을 해야 합니다. 대곡마을 숲은 비보림(裨補林)으로 조성이 됐거든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지세(地勢)가 영락 농기구인 키를 연상케 합니다. 키가 원래는 농기구로서의 역할 외에도 부정을 제거하기 위한 주구(呪具)로도 활용이 됐는데요, 실제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제공하는 한국민속신앙사전을 뒤져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객귀가 들려 아픈 사람의 치병의례에도 챙이[키]를 사용한다. 경남 사천시에서는 환자에게 챙이를 씌워서 앉힌다. 바가지에 물밥을 해서 들고 칼로 환자를 위협하면서 “빨리 나와서 밥을 먹고 떨어져라”라고 외친다. 그런 뒤 칼을 던져 칼끝이 대문을 향하면 객귀가 물러갔다고 여긴다.」

▲ 비보림으로 조성돼 마을을 보듬는 대곡숲 전경
마을이 이렇게 부정을 예방하는 키와 비슷하게 생겼으면 좋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계곡에서 흘러나온 개천이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겁니다. 곡물을 까부르는 도구가 금이 갔다면 당연히 땅바닥에 흩어질 수밖에 없겠죠. 마찬가지로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이 복(福)을 모두 훑어가기 전에 예방하자며 200여 년 전에 비보(裨補)를 했으니 그게 바로 대곡마을 숲입니다.

대곡마을은 대략 300여 년 전에 형성이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100년 정도 흐른 뒤 마을에 호열자(虎列刺, 콜레라) 등 각종 돌림병과 재해가 벌어짐에 따라 대곡 숲을 조성했고, 그 이후 뚝 끊어졌다고 합니다. 『朝鮮の風水』(村山智順, 1931/민음사, 1990완역)란 책(p.528)을 보면 비보(裨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읍면부락을 비롯해서 나라까지 집단생활에 따라 형성되는 집단의 양기가 있고, 이렇게 한 번 설정된 집단 양기는 왕성함을 가져올 만한 시설이나 쇠운을 막아낼 만한 시설이라고요.

▲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대곡숲의 홍송들
일단 첫인상은 소박하다 싶을 정도의 규모에 다소 실망입니다만 막상 숲으로 들어서면 두 아름은 넘음직한 두툼한 허리의 나무에 세월의 무게감을 느끼게 되고, 구불구불하게 하늘을 뻗은 붉은 홍송(紅松)의 현란한 자태에 놀라게 됩니다.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나 싶어서요.

이제 6월로 접어들었지만 5월 말부터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고 있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어디론가 시원한 곳을 찾아 떠나고 싶어지는데요. 여름 휴양지로서의 시원한 장소는 말 그대로 바람이 한들한들 부는 그늘진 곳과 마음까지 터지는 눈이 시원한 곳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할 겁니다. 대곡숲은 눈까지 시원한 곳이라고 강조할 수 없지만 최소한 산들바람이 불고 졸졸졸 개울물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몸이 시원한 곳임에는 분명합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규모가 참 작습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라는 말에 찾아왔다가 속았다고 흥분하는 외지관광객들도 더러 있습니다. 이것도 참 안타까운데요, 지금은 대략 300m에 불과하지만 처음 조성됐을 당시에는 지금의 두 배 넓이에 무려 1km에 달했다고 합니다. 마을의 복이 빠져나가는 걸 막는 수구막이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형세였던 겁니다.

하지만 일제가 숲의 형상이 용(龍)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마구 훼손하고, 그 자리에 지금의 정동초등학교와 면사무소를 만든 겁니다. 무차별 없애지 않고 이런 식으로 공공시설을 조성함으로써 반발을 무마했으니, 왜놈들이 잔머리를 참 영리하게 굴렸다 싶습니다.

▲ 자전거를 타고 대곡숲을 노니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말미에 일제는 부족한 연료수급을 위해 전국의 송진을 강제 채취했는데요, 나무들의 밑둥에 얼핏 하트처럼 구멍 난 모습이 바로 송진채취 흔적이며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200년 세월을 버텨온 대곡마을 노거수는 그런 수난을 당하고도 제자리를 지켜오고 있네요.

▲ 일제에 의해 수난을 당한 노거수들
이렇게 아름다운 소나무들을 위협하는 문제가 몇 가지 있으니, 오랜 시간을 버텨온 탓인지 매년 태풍이 몰려올 때마다 한두 그루씩 부러지기도 합니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이후 산림청의 지원이 있어 후계림을 조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연륜을 그대로 가져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후손들에게는 부디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소나무의 AIDS라고 불리는 소나무재선충병입니다. 매년 겨울만 되면 다시 재선충병 방역 소식이 들려올 정도로 심각하고요, 특히 소나무가 많은 사천시에서 방역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부디 대곡숲의 이 아름다운 홍송들이 쓰러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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