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의 술 취한 실레니우스(Trunkener Silen)1617/18

루벤스의 술 취한 실레니우스(Trunkener Silen)1617/18
술에 취한 듯 보이는 이 노인의 이름은 Silenus이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먼저 디오니소스의 종자(從者)로서 성질이 쾌활하고 사티로스보다도 술을 더 좋아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사티로스(Satyr, Saturos)란 얼굴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머리에 작은 뿔이 났으며,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역시 술의 신 디오니소스 숭배와 관련이 깊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정령이다. 장난이 심하고 주색(酒色)을 밝히는 무리들로서 영어에서 ‘호색한’을 뜻하는 Satyric은 사티로스에서 파생된 낱말이다.

하지만 실레니우스는 사티로스보다는 더 현명하여 일상적인 지혜를 제공하는 자로도 등장하는데 BC 5세기경부터는 디오니소스의 추종자에서 양아버지로도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실레니우스가 예언능력이 있고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평가와 입지가 바뀐 것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다. 역시 이런 이유로 그를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소크라테스의 의향은 어떨지 몹시 궁금하다.

그림에 사티로스도 등장하는데 실레니우스 뒤편에 서 있는 염소다리의 괴수로 표현되고 있다. 실레니우스가 잡고 있는 포도 줄기를 호랑이와 비슷한 동물이 물고 있다. 사실 유럽에는 호랑이가 없지만 17세기 루벤스 당시 이미 동방무역이 활성화되어 있었고 여러 경로를 통해 인도호랑이(벵골호랑이)가 유럽에 선을 보이면서 17세기 그림에 이런 종류의 호랑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림 왼편 하단에 반쯤 엎드린 여인은 두 명의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데 아이들의 발이 모두 염소의 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듯 그림의 오른쪽에는 염소가 두 마리 그려져 있다. 이러한 반인반수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반인반수에 대한 모티브를 바탕으로 하는데 사실 반인반수의 신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신화에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중국의 신농씨와 이집트의 스핑크스 그리고 인도의 나가(Naga)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어쨌거나 실레니우스와 가까이 하고 있는 인물들은 매우 특이한 존재들이다.

디오니소스(Dionysos)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세멜레가 아이를 임신한 채 죽자 그의 아버지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있다가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헤라의 저주로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바로 이 실레니우스 손에 의해 양육되는데 디오니소스가 술의 신인 이유와 실레니우스가 늘 술에 취해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듯하다. 프리기아의 왕 마이더스는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실레니우스를 잘 보살펴 준 덕에 디오니소스로부터 엄청난 능력을 선물로 받는데 그 선물은 바로 무엇이든 손에 닿는 것은 황금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능력이 결코 축복이 아님을 마이더스는 알게 된다.

루벤스 특유의 굵고 튼튼하며 풍만한 인체묘사와 그림의 가운데 실레니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원구도의 그림형식, 지금도 강렬해 보이는 원색의 색상은 거장의 미적 감각과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루벤스는 당시 반 종교 개혁의 중심에서 그림이라는 수단으로 새로운 종교(개신교)의 바람을 막아내는 수단으로 신화를 통해 과거의 영광을 복원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레우키포스의 딸들의 납치-피나코테크의 그림들 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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