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당 최범술의 손길이 닿았던 다솔사 적멸보궁 뒤편의 차밭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차밭은 전남 보성입니다. 아마도 보성의 대한다원을 배경으로 찍은, 삼나무 사이로 수녀님과 비구니 스님이 걷는 CF 한 편이 차의 본고장 이미지를 덧씌웠다 싶네요. 그 누구라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만들어주는 곳, 사실 저도 야밤에 여러 차례 달려가기도 했는데 그만큼 아름답습니다. 새벽에 삼나무 길을 걷고 있노라면 뭔가 도통하는 기분입니다.

보성 대한다원은 1957년 대한다업의 장영섭 회장이 인수해 지금의 차밭이 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요, 역사로만 따지면 대략 70년 가까이 됩니다. 그리고 보성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등 여러 문헌에 차의 자생지로 등장할 만큼 차를 많이 재배하는 곳이죠.

하지만 우리나라 차의 원류는 보성이 아니라 지리산 하동 쌍계사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의 차 문화는 시배지 쌍계사에서 비롯되어 초의선사가 계셨던 해남 대흥사(大興寺)로 이어지고, 쌍계사 지척에 있는 다솔사로 옮겨와 효당 스님을 통해 널리 퍼졌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 당나라로 떠났던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씨앗을

▲ 대양루 입구에는 반 남은 茶도 향기는 변함없다는 효당 스님의 글이 걸려 있습니다
가져왔고, 왕의 명으로 지리산 자락에 뿌렸다고 합니다. 현재 하동군 화개면 골짜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 차나무가 그때의 흔적이라고 하네요.

지금은 누구나 차를 즐기는 시절이 됐지만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가 뭐야? 하고 반문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고, 아는 사람들도 법식도 없이 중구난방 되는대로 그냥 마셨다고 합니다. 전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차례(茶禮) 명맥이 단절됐기 때문입니다. 마시는 것도 지리산 야생 찻잎을 대충 햇볕에 쬐어 말리고 손으로 부순 일쇄차(日晒茶)가 대부분이었는데, 붉고 진하고 쓴 맛에 고개를 살래살래 젓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효당 최범술은 다솔사 적멸보궁 뒤편에서 차나무를 가꿨습니다. 봄이 되면 찻잎을 따고 가마솥에서 덖어 일명 반야로(般若露)라는 차를 만들었는데요, 그 동안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쓴 차를 먹던 사람에게 쓴맛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향기롭고 부드러운 차를 선보였으니 얼마나 놀랬을까요. 눈이 휘둥그레졌을 장면이 저절로 연상됩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차 문화는 효당의 『韓國의 茶道』를 통해서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일본에 거주하는 한 교포가 효당에게 일본에는 다도가 있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차 문화가 없냐며 알려달라고 간청하자, 『한국차생활사(韓國茶生活史)』라는 24쪽 유인물 형식으로 1966년에 간행하고, 1970년에 28쪽으로 개정해서 출간합니다. 여기에 살을 붙이고 보완해서 1973년에 무려 308페이지로 재탄생하게 된 거죠.

▲ 현재 대양루는 차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차 문화를 접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이들에게 차 생활 강의를 하던 곳이 다솔사 적멸보궁의 마당에 있는 대양루(大陽樓)인데요, 한동안 비워놓고 있다가 지난해부터 《다솔사 선차축제》라고 해서 차 축제를 열고 대양루에는 《다솔사茶전시관》이란 편액을 붙여 다솔사의 차 역사를 보여주는 소품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다솔사 선차축제는 올해로 2회째를 맞게 되는데, 5월 10일에 펼쳐집니다.

보통 차는 곡우(穀雨)를 기점으로 따지죠. 하지만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저서 《동다송(東茶頌)》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중국의 다서(茶書)는 "곡우 5일 전이 가장 좋고 5일 뒤가 다음으로 좋으며, 그 5일 뒤가 그 다음으로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험에 따르면, 한국의 차는 곡우 전후는 너무 빠르고 입하 전후가 적당하다(以穀雨前五日爲上 後五日次之 再五日又次之 然驗之 東茶 穀雨前後 太早 當以立夏前後 爲及時也)"

입하(立夏)는 24절기 중 곡우 다음 절기로 5월 5일에서 8일 경입니다. 입하 전후라고 했으니 5월 10일이면 초의선사가 말한 시기와 딱 적절하네요. 지금도 그렇지만 차 좀 마셔봤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순례삼아 들르는 곳이 바로 다솔사인데요, 다솔사 선차축제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일반까지 널리 공개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예전부터 있던 이백 년에서 삼백 년은 묵은 야생 차나무와 효당 스님이 심은 차나무가 더해져 옹기종기 차향(茶香)을 내뿜고 있으니, 선차를 마시고 심신을 수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현재 다솔사의 차향은 인근의 진양호 물길을 타고 퍼져 《다자연(All Nature)》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자연은 2003년 경 사천의 96개의 농가가 힘을 합쳐 조성한 영농조합법인으로, 단일농가로는 국내 최대 녹차 산지입니다. 규모가 181,819㎡로 대략 15만 평이나 되고, 150만 주의 녹차묘목을 심어서 2007년에 첫 수확을 했다고 합니다.

▲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바라본 다자연의 차밭 전경.
보성의 대한다원과 같이 비탈의 유려함은 없습니다만, 광활한 대지에 펼쳐진 차나무 군락에 입이 떠억 벌어지고 가슴까지 탁 트이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겁니다. 아침 물안개가 낄 때 방문을 하면 차밭을 둘러싼 산세와 어우러져 선경(仙境)을 방불케 합니다. 방문객이 별로 없을 때 차밭 사이로 차를 타고 지나가기도 했는데요, 갑자기 꿩이 뛰쳐나와 심장을 콩닥콩닥 뛰게 합니다. 사실은 꿩이 더 놀랬을 텐데 그 생각은 못하고 말이죠.

그렇게 차향을 가슴에 가득 품고 진양호 호반을 따라 한 바퀴 돌면 차향 드라이브는 완성됩니다. 다사로운 봄날에 이처럼 멋진 여행이 또 있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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