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제들은 유치원 시절까지는 어머니를 따라 여탕에 다녔으나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는 남탕 출입이 허락되었다. 남자로서 홀로서기 최초의 행사가 남탕 단독 출입이었던 셈이다.

목욕탕 안에는 갖가지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른 조약돌들이 시냇가 마냥 널려있었다. 일단 욕탕에 들어가면 우리는 제각기 그 조약돌을 하나 씩 골라잡고 자리를 잡았다. 우리 같이 작은 아이들에게는 아이들 손에 들어오는 앙증맞게 자그마한 조약돌이고 우리들 주먹보다 더 큰 돌들은 어른들 몫이었다.

발꿈치나 팔꿈치에 붙어 있는 단단한 굳은 때를 밀기위한 때밀이용도였다, 당시에는 때밀이 수건이 나오기 전이기도 했지만 때밀이 수건이 있다 해도 별무소용이었을 것이다.

몇 달이고 묵힌 굳은 때가 수건 따위에 밀릴 리가 없었고 그러기에 오로지 유용한 것은 돌멩이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다 목욕탕 가운데 있는 커다란 욕조에서 푹 때를 불렸다가 나와서 돌로 뿍뿍 문질렀다.

어린 우리들은 잠시도 들어 앉아 있기 힘든 뜨거운 물속에 어른들은 목까지 푹 가라 앉아 있으면서 “어따, 시원하다!”고 하면서도 연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물이 조금 식었다 싶으면 뒤편의 보일러실로 ‘따신 물! 물 주소!’하고 소리치면 한 참 뜸을 들인 후에야 탕의 밑쪽에서 뜨거운 물이 들어왔다. 당연히 그 순간 우리들은 우당탕 탕을 뛰쳐나왔고.

욕탕에는 샤워기는 없었고 마지막 헹구는 깨끗한 물이 담긴 수조가 따로 있었다. 그런데 그 구조가 묘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겠지만 남녀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수조였다. 어떻게 되어있는가 하면 목욕탕 입구 쪽 딱 중간에 깨끗한 물이 담긴 수조가 있었고 그 수조위로 나무로 만든 칸막이가 있었다.

남녀 욕객들은 그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같은 수조를 이용했는데 바가지를 뜨는 손과 손목 정도는 서로 보였다. 이 수조가 있는 공간은 남탕과 여탕 사이의 소통공간이기도 했다. 한 마을에서 같이 목욕 온 부부, 남매 등이 서로 나갈 시간을 맞추는데도 유용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작스럽게 헹구는 물이 담긴 수조 위의 나무 칸막이가 꽝 소리를 내며 남탕 쪽으로 넘어졌다. 잠시 적막의 순간이 지나고 사태를 파악한 목욕탕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남녀 할 것 없이 어른들은 탕 속으로 몸을 숨기는데 이런 경우 항상 용감한 사람들은 여성, 특히 할머니들이다.

“보소, 남정네들이 무엇하고 있소! 냉큼 칸막이를 세워야지!”

“허참, 우리라고 어찌... 허, 허, 참내”

남자 어른들은 슬금슬금 서로 눈치를 보면서도 나설 수 도 없었고 연신 헛기침만 해 댔다.

그 후 칸막이는 단단한 벽돌로 쌓였고 헹굼 물이 담겨있는 수조는 각각의 탕에 따로 설치되어 양 탕은 완벽히 단절되었다.

목욕탕 할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고인이 되셨을 터이고 구씨 성을 가진 자녀들도 오래전에 사천을 떠났단다.

기억력이 비상하신 노모도 기억하지 못하니, 그 추억의 목욕탕 이름을 아는 사람이 이제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 아무튼 해방 후 사천읍 최초의 목욕탕은 서울빵집 건너편 길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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