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구계서원에서 장원급제의 기운을 받아도 좋겠네요.
개인적으로 책 욕심이 있어서 읽든 읽지 않든 간에 책 사재는 것을 좋아합니다. 결국은 온 집안을 책으로 도배해 작은 도서관 같이 변했는데요, 이런 쓸데없는 걸 왜 사 모으느냐고 타박하는 사람도 있고 부럽다는 사람도 있네요. 어쨌든 책에 둘러 쌓여있다는 자체가 좋은데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 사서나 도서관장도 한때 꿈이었습니다.

구암(龜巖) 이정(李楨) 선생의 첫 직업은 일종의 도서관장이라고 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입니다. 저의 로망과 맞닿아 있어서인지 첫 공직부터 어쩐지 폼이 납니다. 전적은 품계로 따지면 정육품(正六品)인데요, 장원 급제자에게 대체로 종육품(從六品)이 제수되는 걸 감안하면 영민함이 정말 대단 했던가 봅니다.

정육품과 종육품이라고 해봐야 품계 차이는 하나라 별 것 아닌 걸로 생각하기 쉬운데요, 당시 공직은 종구품부터 시작했고 승진은 보통 2년 정도 걸렸습니다. 연공서열이 찼다고 바로 승진이 되나요? 때때로 물먹기도 하다보면 늦춰지는 게 다반사입니다. 게다가 자리는 한정돼 있고 경쟁률은 치열했으니 인맥과 학맥 등 온갖 연줄을 동원해야만 겨우 한 계단 올라서는 겁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관리들 또한 과거시험을 계속 봤다고 합니다. 아홉 번 과거를 봐서 아홉 번 장원급제를 했다고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던 율곡 이이 선생의 예가 그렇죠.

구암 선생은 성균관에서 박사(博士: 正七品)들을 거느리고 도적(圖籍)의 출납관리를 책임지면서 학문의 중요성을 깨우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데, 서장관이란 직책은 조선시대에 외국으로 보낸 외교관입니다. 성절사는 대략 30명 정도로 구성돼 있고 여기에 식솔 수백 명을 이끌고 다녀오는데요, 그 중에서 세 번째로 높은 양반으로서 외교 실무를 책임지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외교 실무를 하려면 외국어는 능통해야 하지 않나요? 구암 선생은 26살이란 나이에 외교 실무자가 되어 명나라와 협상을 했군요. 역사스페셜인가 어디선가에서 본 내용으로, 명나라와 청나라는 조선의 사절단이 오기를 꺼려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절단은 무역을 겸하기도 했는데요, 어찌나 협상을 잘 하는지 탈탈 털리기 일쑤라 어지간하면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대충 지나가다가 본 내용이라 어느 시기인지는 짐작치 못하지만 당시 외교관례가 그러했다면 계속해서 이어졌을 겁니다.

▲ 남명이 찾았던 쾌재정은 옛모습을 잃었고 500년 세월이 노거수만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공직생활은 무려 36년에 걸쳐 중종부터 인종, 명종, 선조에 이르러 4대조의 임금을 모시게 됩니다. 25세에 출사해 55세에 은퇴를 하기까지 중앙요직보다는 영천·청주·경주·순천 등 각 지역의 부사로 지내며 백성들과 함께 한 세월이 더 길었습니다. 장원급제자가 평생 외직만 돌며 공직생활을 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기로 하고, 전국의 변방을 떠돌던 구암 선생의 철학은 애민(愛民)으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이라는 사상을 학문이 아니라 온 몸으로 실천을 했고, 서원 등을 지어 학문의 진흥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경주부윤 재직 당시 서악정사(서악서원)를 세웠고, 순천부사로 재직할 때는 전라도 최초로 사액을 받은 옥천정사(옥천서원)를 건립했으며, 만년에 당상관인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됨에도 취임하지 않고 고향인 사천으로 돌아와 구암정사(구계서원)를 건립합니다. 서원은 조선시대 최고 학문의 전당이자 조선조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사립대학이죠. 그렇게 세운 서원은 모두 사액을 받았습니다. 유일무이한 오직 구암 선생만의 치적입니다.

구암 선생의 생을 훑어보다보면 당대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퇴계는 구암보다 11살 연상이었지만 구암은 25세에 장원급제로 출사하고 퇴계는 34세에 급제했기에 관직에 머물던 시기가 거의 비슷합니다. 그렇게 함께 공직생활을 하면서 친분을 나눴고 나중 도산서원에서 퇴계에게 직접 성리학을 배웠으며 이후 평생 서신을 교환하며 교분을 다졌습니다.

현재 퇴계 선생이 보낸 백여 통의 서신이 남아 있는데 오고갔을 서신 중 구암 선생이 보냈을 백여 통의 서신은 오리무중입니다. 이도 참 안타까운데요,

구암 이정 선생이 만년을 보낸 구계서원.
아마 퇴계가 학문으로서 성리학을 다듬으면 구암은 애민사상으로 현실에 접목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또한 경상도를 좌우로 갈라 일가를 이룬 남명 선생과의 교분도 두터웠는데요, 남명 선생은 두류산 유람길에 부러 사천의 구암을 찾아 방문하기도 합니다.

두 거유가 후대에까지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학문적 성취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후학의 양성에 힘썼다는 부분입니다. 높은 학문을 배우고자 수많은 선비들이 아래로 모여들고 그렇게 모인 인맥은 곧 계파를 형성하게 됩니다. 만일 장원급제를 한 구암 선생이 관직이 아니라 오롯하게 후학양성에만 힘을 썼으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몰렸을까요.

마침내 고향인 사천으로 돌아와 구계서원을 열고 후학지도에 나선 시기는 그의 나이 57살 때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년 후 60이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애민사상으로 평생 백성들을 돌보다 뜻한 바를 정리하고 제자 양성에 나섰던 시간이 너무나 짧았습니다. 저작도 소실되고 그의 학문적 성취를 돌아볼 자료마저 빈약합니다. 그래서인지 지역민들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애통한 일입니다.

작년이 구암 이정 선생의 탄생 500주년이었습니다. 와룡문화제 기간에 함께 구암제가 펼쳐지므로 이젠 조금씩 그 이름을 알릴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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