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학교교무실에서 있었던 일. 김 선생이 너스레를 떨면서 들어온다. 부장교사인 그는 교장 앞에서는 교활한 아첨꾼이고 갖은 서비스를 다하는 흥부지만 동료나 후배들에게는 쓴 술 한 잔 내 본적이 없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놀부이다.

업무는 별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도 혼자서 학교를 다 이끌어가는 듯 생색내는 데는 능숙하다.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 책상에 요란스럽게 보따리를 하나 떡 하니 올려놓으면서 의기양양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이것 좀 보소! 고급 메이커가 척 붙어 있는 와이셔츠요. 한 벌도 아냐 무려 네 벌! 이것들을 내가 얼마에 산 줄 알아? 아니 그저 주었다고 해야 할까? 우하하!”

‘저 인간이 또 무슨 수작이야?’ 하는 표정으로 교무실의 교사들은 모두 심드렁하다.
김 부장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말을 한다.

“내가 어제 심야 버스 타고 내려 왔잖아. 인삼랜드에서 쉬더구먼. 볼일 보고 버스로 돌아오는데 한 젊은 친구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거야. 요 앞 휴게소에서 자기 부인하고 심하게 다투었는데 화가 난 마누라가 차를 몰고 혼자 가버렸대.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 여기까지 달려 와서 차는 찾았는데 휴대폰도 안 받고 사람도 안 보인다는 것이야. 자기 생각으론 어디선가 숨어서 자기 꼴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데 차문은 잠겨있고 차에 옷도 지갑도 다 있다는 것이지. 자신은 차 옆에서 줄곧 지키고 있을 요량이지만 택시는 보내야 하고. 그런데 손에는 형제간에 나눌 와이셔츠 보따리만 달랑 있고, 이것 때문에 싸웠다 하더군. 하여튼 우선 이것을 맡고 택시비 4만 원만 빌려 달래.”

그는 득의만면한 모습으로 찬 물을 한 잔 쭉 들이킨다.

“아이고, 밤새 차타고 오니 피곤하네. 내가 탄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마누라 찾으러 간 그 친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야. 어쩌겠어? 버스 보내고 그 친구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고. 그냥 빠이빠이 하고 왔지. 으흐흐”

김 부장이 풀어 놓는 보따리에 한 장에 십 수 만원은 호가하는 유명 메이커 표시가 선명한 셔츠 상자가 쌓여 있다. 그 상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왜 저런 인간에게만 이런 행운이 따르지?’하는 편치 않은 심사들이다. 그런데 상자를 열어 셔츠를 살펴보는 순간 모두 배꼽이 빠져 죽는 줄 알았다. 상자에는 셔츠 목 부분만 곱게 포장되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아니, 목만 여기 두고 몸통은 어디로 사라지셨나?” “우하하!”

전과 십 수 범에 달하는 사기꾼이 한 말이 기억났다. 사기꾼들은 자신을 접시라 부른단다.

“접시에 담긴 물건(사기 당한 피해자)들은 욕하겠지만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 요행을 바라거나 도둑놈 심보를 가진 자들만이 접시에 담기거든. 실력 차일 뿐이지. 착한 사람들은 애당초 사업 대상이 안 돼!”

그래서 절도나 강도를 당하면 동정이라도 받지만 사기를 당하면 조롱만 당할 뿐이다. 이제 또 한 바탕 정치 굿이 벌어진다. 6.4 지방선거가 코앞에 와 있다. 사기 중에 가장 고약한 것이 정치 사기다. 요행수나 바라는 사기 기질을 가진 사람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선량한 국민전체가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정치사기의 요체는 공약이다. 公約인지 空約인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잘 못 찍어 당하고도 조롱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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