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대화할 때 가끔씩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돈 산다’란 말이었다. 돈의 용도 자체가 물건을 사는 것인데 그런 돈을 어떻게 사는 것인지 참 들어도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 60년대 사천 사람들은 다 농사를 지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농사가 있었고 바다의 어부들도 텃밭은 있었으니 농업이 주업이냐 부업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지 농사가 없는 집안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농사짓는 집에서는 학교 월사금을 낼 때나 만져볼까 좀체 현찰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집에도 농토가 있었지만 주업은 상업이었다.

실질적으로 도매상 사장인 어머니 자리 옆에는 금고가 있었고 그래서 항상 돈 구경은 할 수 있었다. 그 돈을 보면 문득문득 할머니의 암호 같은 말씀이 생각나 중얼거렸다.

“돈을 무엇으로 어떻게 사지?”

아버지는 바깥 활동에 바쁘고 어머니는 가게를 운영하였으니 우리 집의 오롯한 농사꾼은 할머니였다. 우리 논의 일부는 사주리와 댕기 마을에 있었는데 매일 할머니는 손자인 나를 데리고 논밭으로 나갔다.

보리가 이삭을 팰 때 쯤 되는 봄철이면 꿩알을 꼭 몇 개씩 주어서 삶아 간식으로 맛나게 먹었는데 아무리 두 눈을 씻고 보아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꿩알이, 항상 눈이 침침하다 하시는 할머니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항상 지팡이로 보리나 나락을 쓸어 올리는 것 밖에 하지 않았으니 내가 보기에는 할머니는 농사꾼은 아니고 틀림없는 꿩알 사냥꾼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계산에 있어서는 영락없이 농부였다. 매사 생각의 중심은 농업이었고 쌀이 가장 중요한 화폐이고 거래의 기준이었다. 주로 이런 식이었는데 할머니의 계량 방법은 참으로 난해했다.

“댕기마을 김 씨 첫째 아이가 아프다니 쌀 댓 말 보내라. 또 절에 큰 불사가 있으니 쌀섬을 내서 공양해야 할거다.”

어린 아이 귀에는 이런 도량단위가 참 어려웠다. ‘댓 말’이란 ‘네 말에서 다섯 말’을 의미하는데 ‘대여섯 말’ 하면 그 범위가 ‘네 말에서 여섯 말’까지로 늘어진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곡식량을 측정해서 주고받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할머니의 거래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했다.

그리고 ‘한 섬’이란 두 가마를 뜻하는 정도는 알겠는데 ‘쌀섬’이라면 또 아리송하다.

“할머니, 쌀섬은 얼마 정도인가요?”
“응. 두세 가마니를 말한단다.”
“참, 두 가마니면 두 가마니고, 세 가마니면 세 가마니지 두세 가마니는 또 무여?”
“응. 고방에 도정한 쌀이 두 가마 있으면 두 가마 내면 되고, 세 가마 있으면 세 가마 내라는 것이제.”
“네?”

그런 할머니에게도 현찰이 때론 필요했고 그 돈을 구하기 위해 쌀을 풀어야 했다. 그러니까 할머니에게는 ‘돈이란 쌀로 살 수 있는 물건’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5·16 쿠데타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는데도 쌀값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농사만 바라보고는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은 대거 이농하여 도시의 공장 지대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산업 노동자가 되었다.

산업화라는 빛에 가려진 짙은 그림자에 농업이 있었다. 할머니는 끝까지 왜 농업이 천시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쌀이 이렇게 천대 받는 게야? 천한 돈 살려고 귀한 쌀을 얼마나 내야 되는지 모르겠네! 작년보다 올해는 쌀섬을 더 내야 하는 모양이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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