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일요일 아침 눈을 뜨면 참 좋았다. 학교가지 않아도 되는 아침은 온 사위에 평화로운 기운이 넘치는 듯 가득했고 가슴 벅찬 해방감에 얼굴에는 저절로 방긋방긋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마음껏 늦잠도 자도 되었기에 이불위에서 뒹굴 거리며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침을 먹고 나면 서서히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목욕탕 순례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은 매주 목욕탕에 가지 않아도 좋았다. 여름철에는 하동(河童)이 되어 강에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따로 목욕할 이유가 없었고, 날씨가 서늘해져 냇가가 멀어지는 계절에는 어김없이 추석과 설이 돌아왔고 명절맞이 목욕을 하면 됐던 것이다.

‘그런데 난 왜 매주 목욕탕에 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만 미치면 매주 목욕 고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벗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 아침나절부터 목욕 때문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여러 가지 못 갈 이유도 찾아내고 심통을 부려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목욕 수건을 집어 들었다. 내 보다 덜 고집스럽고 마음이 조금 더 여린 동생이 중간에 나서곤 했기 때문이다.

“형아, 그냥 가주자. 엄마가 저리 가라고 채근하는데, 이번만 가 주자!”

동생이 중재에 나선 것도, 또 내가 못이긴 채 길을 나선 것도 순전히‘서울 빵’ 때문이었다. 목욕을 가는 대가로 서울 빵 한 개씩 사 먹을 돈이 손에 쥐어졌고. 서울 빵은 우리 형제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서울빵’은 학교 앞 구명가게에서 파는 과자나 동네 점방에서 살 수 있는 풀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마력의 맛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주전부리는 눈깔사탕을 고물 사이사이에 박아 놓고 쪄낸 백설기였다. 하얀 백설기에 발갛게 사탕이 녹아 스며있는 달콤한 부분을 쏙쏙 뽑아 먹으면 그 맛 역시 일품이긴 했으나 나머지 부분은 그야말로 떡 맛에 불과했으니, 빵 껍질에서부터 속까지 골고루 맛있는 서울빵에 역시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팥빵 껍질은 바삭하면서도 고소하고 팥 앙금은 그 달콤하기가 꿀맛보다 더 했다. 도톰한 반달 크림빵에 들어있는 노란 크림의 향은 그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는 짙은 달콤한 향을 내 뿜어 노란색만 보면 입안에는 침이 가득 고이고 크림빵이 저절로 머리에 떠오를 지경이었다.

목욕탕 길 건너에 있는 서울빵집에서 우리 형제는 또 다시 갈등했다. 짜장면과 짬뽕을 놓고 고민하듯이 단팥빵과 크림빵 사이에서의 선택! 전혀 다르면서도 지독히 다 맛있는 두 가지 빵은 우리를 언제나 번뇌케 했다.

하얀 미농지에 담긴 빵은 자태를 살짝 내비쳤고 버터와 그림의 냄새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 형제는 그 향을 먼저 들이켜야 했기에 집에까지 빵 봉지에 코에 박고 왔다.

당시 경상도 말과 다른 지방의 말은 우리들에게는 다 서울말이었고, 그런 말을 써는 사람들을 서울 사람이라고 불렀다.

전쟁을 피해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만든 그 ‘서울빵’은 제과점 빵이었고 해방 후 사천 최초의 제과점인 ‘서울 빵집’은 평화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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