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엔 거북선이 태풍이 불 때는 어선들의 피난처였을 대방진굴항.
유구한 역사를 품어온 한반도에는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라던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역사적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사천지역도 다를 바 없는데 과거 흔적을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흔적이 참 많습니다.

고려조는 조세를 바닷길을 통해 거둬들였(조선조에서는 뱃길의 위험성 때문에 육로 이동을 선택했고 이 때문에 고려조 12조창 중 하나였던 사천 통양포, 현재의 선진리는 홀대를 당했죠)고 남해안의 중심지였던 사천지역이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안은 왜구들의 침탈이 잦은 지역이기도 하죠. 따라서 이들을 물리치기 위한 군사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는데요, 그 하나가 바로 대방진굴항(大芳鎭掘港)입니다.

고려 말 왜구들의 침탈을 방어하기 위해 현재의 굴항 부근에 구라량영(仇羅粱營)을 설치하였고 이후 해군들의 군사요충지가 되어 바다를 지켜왔는데, 굴항의 존재가치를 한껏 드러낸 백미는 임진왜란 당시의 사천해전(泗川海戰)입니다. 이순신 함대가 두 번째로 출전해 치른 첫 해전이자 거북선이 최초로 출격해 승전한 전투이니까요.

대방진굴항은 보면 볼수록 묘한 곳입니다. 바다에서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어 현대의 방파제와 거의 동일한 형태인데요, 이걸 인공으로 조성했다는 게 참 놀랍습니다.

해군선이 정박하는 군사기지임에도 바다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파도가 높은 날 또는 태풍이 몰아칠 때는 어선 대피장소로도 활용이 됐을 겁니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형식의 방파제를 인공으로 조성했을 것 같기도 한데요, 그래서 자료를 좀 찾아봤더니 인터넷으로 ‘굴항’이라고 검색해보면 오직 대방진굴항만 검색됩니다.

그러다 사료를 뒤적이다보니 규장각 자료에 몇 군데가 더 있습니다. 먼저 남해군 미조면 미조항이 과거에 굴항이었네요. 1486년(성종 17)에 사람들을 동원해서 쌓았다가 왜구에게 함락 당했고, 1522년(중종 17) 경 원래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에 돌로 다시 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태안반도의 안면도에도 굴항을 조성했다고 되어 있는데요, 이곳은 전라도와 영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을 위해 설치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천 대방진굴항만 이름을 남기고 있으니 일단 역사적 의미에서 남다르다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유산을 가장 잘 활용한 게 바로 이순신 장군이죠. 전쟁에서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인데, 여기에 거북선을 숨겨뒀다가 사천해전에서 멋지게 한 건 한 겁니다.

다만 사료를 아무리 뒤져봐도 굴항에 거북선을 숨겼다는 내용은 없네요. 역사와 지리의 절묘한 조합으로 탄생한 일종의 영웅담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자료를 제대로 찾지 못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전쟁에서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뒤통수를 치는 겁니다.

기기묘묘한 전략도 알고 보면 적을 속이는 방법이죠.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병법 삼십육계(많은 사람들이 삼십육계가 손자병법에서 비롯된 걸로 오해하고 있는데요, 손자병법에는 삼십육계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의 첫 번째 전략이 ‘만천과해(瞞天過海)’이며 즉, 하늘마저 속일 것을 요구하는 기만술입니다.

아군의 전력을 숨겨 적군이 오판하게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으니 굴항에 거북선을 숨겨뒀다가 짠~!하고 등장해 악당을 물리치는 명장면이 만들어진 겁니다.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 이젠 굴항 밖에 또 하나의 굴항이 만들어져 있네요.
사천해전사를 보면 당시 아군의 주력선은 판옥선이고 거북선을 선두에 앞세워 돌진했다고 합니다. 영귀선(靈龜船)이라고 불렸던 만큼 겁나는 형상이었던 것 같고, 이런 배가 적진 한가운데 들어와서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사자총통(四字銃筒)과 각종 화포를 사방팔방으로 쏴댔으니 혼비백산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을 겁니다.

병법에 의거하면, 전쟁은 하기도 전에 이미 승패가 결론지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전투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론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대단함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도 드러나는데요, 이순신 함대가 출전을 할 때는 이미 전략적으로 허물어진 상태였으며 말도 되지 않게도 전술적 승리를 통해 전략적 승리를 쟁취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국가 간의 전쟁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이순신과 거북선의 위대한 행보가 사천해전에서 시작됐으니, 정말 찬란하게 빛나는 또 하나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방진굴항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개보수를 하다가 1820년 경(순조 20) 진주목 관하의 73개 면에서 수천 명이 동원되어 조성되었다고 하고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되면서 복원 및 환경개선사업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습니다.

▲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굴항을 지켜온 팽나무들
순조 때 심었을 수백 년은 된 팽나무들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며 새파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데요, 고요한 물에 반영된 빛깔이 정말 곱습니다. 곧 봄이 되면 산수화 같이 싱그러운 자태를 다시 볼 수 있겠죠. 바로 지척으로는 창선·삼천포대교가 가로질러 가는데 이 또한 눈을 즐겁게 합니다.

현재 사천시에서 사천해전 거북선 출전지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죠. 오는 7월까지 기본계획을 완료한다고 하는데, 대방진굴항은 대상에서 빠진 것 같습니다. 사적 근거가 부족해서 빠진 걸까요,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이번 성역화사업과 관련해서 논란도 있네요. 관광자원화와 사업 편의성을 이유로 사천해전사에 대한 고증을 소홀히 하는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참으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만일 왜곡된 역사를 배경으로 사업을 진행했다가 세월이 흐르면 그것이 정설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역사는 지키려는 노력을 할 때 더욱 빛이 난다는 걸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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