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실 딸이 우리 부부를 위해 예매해 주기 전까지 이 영화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주저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극중의 국밥집 아이가 고문을 당하는 장면에서 아내는 내 손을 꼭 잡고 숨죽여 울었다.

이것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가 영화 관람을 망설였던 것은. ‘변호인’ 에는 필연적으로 이런 고문 장면들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나의 고통스런 과거, ‘고문의 추억’이 연상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에 시국관련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는데 그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다. 엄혹한 야만의 시절 죽음의 공포 속에서 60여일이나 고문을 겪어야 했던 나이 어린 ‘부림 사건’ 피해자들의 고통에 비하면 내가 당한 것은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이다.

내가 겪은 ‘교도소 내 양심수 집단 고문 사건’은 어느 화창한 초여름 저녁 일과가 끝난 후 양심수 50명을 일제히 끌고나가는 것으로 시작됐다. 나를 강제 연행하러 온 교도관 두 명을 복도에 패대기 쳐버렸다. 그러자 재소자들 앞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체면도 권위도 내팽개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줄행랑을 놓았다. 기왕에 당할 것, 나도 할 만큼 해보자는 심사였을 것이다. 교도소 측은 양심수들을 곳곳에 흩어 놓고 교도소 특유의 고문을 가했다. 그들의 요구는 간명했다.

“항복해! 그러면 풀어준다.”

“무엇을 항복하란 말이야?”

“몰라, 그냥 항복한다고 하면 돼.”

감옥의 고문은 공안기관의 고문 기술자들이 지니는 정교한 기술은 없었다. 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18척 담장 안에서 왜정시절부터 내려 온 고문은 거침이 없었고 무작했다. 때문에 분실에서 29일씩이나 잘 버텼던 사람들도 속절없이 항복을 했다. 내 곁에서 항복을 거부하며 고문 받던 동료는 끝내 혼절해 버렸다. 들것으로 그를 실어내가는 교도관의 당황한 소리가 들렸다.

“빨리 빨리 움직여, 사고 났어. 쌩똥을 쌌어!”

사람이던 동물이던 단말마적 표징이 괄약근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다행히 그는 대학병원으로 후송되어 생명은 겨우 건졌다. 그런 사고가 났음에도 고문은 계속되었고 끝까지 버틴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항복하지 않은 대가로 다섯 명은 수갑, 족갑을 차고 또 포승에 묶여 감옥안의 감옥인 0.8평 1인용 징벌방 한 칸에서 일주일간을 단식으로 버텨야 했다.

환기구가 하나 밖에 없는 1인실인지라 산소가 부족하여 번갈아 가면서 공기구멍에 코를 박고 공기를 들이켜야 했고 국회진상조사단이 내려와서야 풀려났다. 그 뒤 어머니를 면회소에서 만났다.

비록 지은 죄 없이 감옥에 와있지만 수의를 입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식으로서 못할 짓이라 어머니는 면회를 오지 말도록 당부하고 있었기에 첫 면회였다. 대뜸 물었다.

“둘째야, 항복했나?”

“안 했습니다.”

“잘했다. 난 가마.”

지난 2월 13일 부산지법에서 부림 사건 피해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32년 만이었다. 영화 변호인은 지난주로 관객 수가 1100만 명을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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