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시간에 문제지 들고 들어오는 선생, 꼭 저승사자 같지요. 예전에 저도 그랬습니다.

“저승사자 왔습니다!"

한숨과 손 비비기, 예상문제 부둥켜안기, 온갖 모습이 연출됩니다.

“이름 비밀로 하면 학점도 비밀입니다!” 긴장 풀어주려 나름 서비스 하는 겁니다.

한숨이 천장을 찌르지요. 머리카락 있는 대로 잡아당기고 쓸어 넘기고 야단납니다.

“앙천탄식형”이나 “두발발췌” 둘 중 어느 것인가요? 아주머니들 청소 힘들어하세요.

짜증내던 얼굴이 조금 펴지며 여기저기에서 킥킥 소리가 새나옵니다.
중간고사 답안지 제출하며 암담한 얼굴이었던 학생에게 “기말고사 잘 보면 돼요.” 외상 줬는데 성실하게 갚을 런지요.

그렇게 한 학기 끝나면 꽤 한참 학교 앞은 썰렁할 겁니다. 사십 여 년 단골인 구두 수선집 영감님, 늘 엉망인 제 신발 산뜻하게 고쳐주시고 아울러 반짝거리도록 닦아주시는 어른, 이번 겨울도 무탈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갈수록 간절한 마음으로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12월로 접어들면 여간해 복잡한 곳 나가지 않는데도 여기저기서 캐롤이 넘쳐납니다.

눈 소복히 쌓일 교정에 발걸음 뜸 할, 눈 퍼런 젊은이들에게 연말 음악 하나 소개하렵니다. 미국 출신의 매혹적인 소프라노 캐틀린 배틀이 자신의 피부색과 비슷한 할렘소년 합창단과 함께 부른 크리스마스 캐롤집이 있어요.(Christmas Celebration, EMI) 첫 곡을 걸면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며 미모까지 뛰어난 이 여성이 비단결 같은 목소리로 할렘 소년 합창단과 천상으로 날아오릅니다.

수십 년 전 이 음반 구하고 어찌나 사랑스럽고 좋은지 교회도 안 다니는 제가 굉장히 여러 번 닳도록 들었습니다. 갈수록 종교에 까다로움을 피우지만 전쟁터(Battle!)가 부른 <거룩한 밤>의 꿈결 같은 목소리에는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아휴, 세상에나...” 행복한 탄식만 나옵니다. 들어 보세요. 함께 행복해 지는 것 장담합니다.

또 있어요.
1940년 대를 흔든 영국 출신 콘트랄토의 정점인 우아한 목소리가 울려 옵니다. 음악을 눈으로만 들으며 평론가라며 목소리 키웠던 엉터리들이 어디선가 읽은 자료만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등단 이전의 직업을 대단한 커리어인 듯 떠들어 대던 캐슬린 페리어. 사람,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에 이런 기품이 담길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던 이 양반의 음성은 “콘트랄토가 이런 거구나!” 정신 번쩍 들게 해줘 해질녘이면 더러 꺼내 듣습니다.

<거룩한 밤(Oh, Holy Night)>은 장중하게 듣는 사람을 정화시켜줍니다. 너무 일찍 세상 버리고 전성기 목소리 함께 묻어버린 분, 오래전 녹음이라 음질은 떨어져도 우리에게 남긴 고운 감성은 절대로 사그라들지 않아요.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그래서 분주해집니다. 집에서 음악 들어야지요.

수굿하니 어떤 집에서 넝쿨째 굴러왔다고 반길만한 참한 학생이 어느 날 다가왔습니다. “내 딸로 태어나 줘 고맙다.” 그러셨어요. 꽤나 먼 곳에서 서울로 유학 온 딸에게 그동안 많이 혼내던 어머니가 백 번 넘는 절을 매일 하신다며 눈매가 젖어듭니다. 어미 마음을 더러 강조하는 제 말이 자기 어머니 말씀과 같더라고 하면서요.

치매 앓는 어머니 잘 보살피는 형수가 늘 고맙고, 당장 빚 못 갚는 현실에 민망해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대견한지 귀국하면서 형수께 좋은 선물하라고 지갑 털어줬던 아무개 씨. 꽤 오랜 시간 어학연수 했지만 전라도식 중국어 하는 속 깊은 청년이 제게 선물했던 자그마한 액자 넘겨야겠습니다. 장가들어 아들 낳고 잘 사는 모양입니다. 녀석 유치원 뛰어다니겠네요.

조금씩 어미 마음 이해하는 기특한 딸 키우신 학생의 어머니께 그동안 제가 마음 훈훈하게 잘 지녔으니 좋은 청년의 마음만 지니고 다른 분에게 입양 보내도 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글 올립니다.
겨울에 특히 좀 더 헤매는 저를 비롯해 많은 분, 마음 따뜻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우리 모두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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