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 愛 빠질 만한 이야기 - 11

▲ 초양도에서 바라본 늑도.

고고학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리스 신화를 읽다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알게 되었고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신화와 역사의 간격이 좁혀지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유적과 유물을 통해 과거의 찬란한 문명을 확인하는 작업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하는 환상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따가운 땡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삽질하는 게 주업이라는 말에 지레 겁먹고 포기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단편적인 유물로 고대사와 고대인들의 삶을 추리하고 신화와 역사의 고리를 찾아내는 마법과도 같은 학문,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닌가봅니다.

앞서 늑도는 고대에 국제무역을 행하던 도시국가였다고 했는데 그 조그만 섬 하나를 두고 도시국가였다고 하니 조금 가소로운 느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계산은 아닙니다. 현대의 국가와 비교하다보니 벌어지는 일종의 갭이죠.

인류학에서는 주거 단계를 대략 수백 명의 마을(village), 수천 명의 타운(town), 수만 명의 도시(city)로 구분합니다. 당시 늑도 유적발굴은 연륙교 공사 때문에 급하게 일부만 하고 말았는데요, 그렇게 발굴된 주거지만 254동이며 이것만 대충 환산해도 당시 인구가 1500여 명입니다. 이미 도시국가 전 단계인 town인데 여기에 섬 전체로 확대하면 훨씬 많은 인구가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 남해 창선의 500년 넘은 후박나무.

또, 동네 깡패들도 구역다툼을 하는데 하물며 한 지역을 주름잡은 지배세력은 오죽했을까요.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인 식량보급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을 것이며, 일단 늑도는 급경사를 이루는 지형에 수원도 부족하니 농사지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곡식을 저장한 흔적은 있으니 어디에서 가져왔는지를 살펴봐야할 텐데, 어라? 인근지역 사천 이금동과 남해 창선면에 농사를 짓던 청동기유적이 있네요? 그러니까 이런 지역까지 세력권이었다고 감안하면 늑도는 상당히 유력한 도시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고고학의 기본은 이선복 교수의 『고고학 이야기』라는 책을 통해서 조금 맛을 봤는데요,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50년대에야 확인된 청동기 시대>라는 장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우선 청동기시대 한반도의 전체 인구는 대략 1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고 청동기는 ‘오늘날과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사회의 원형’이라고 합니다. 청동기 자체가 ‘사회적 계층화와 조직화가 없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도구’이며, ‘국가의 발생 내지 계급사회의 등장과 뗄래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문화사적 단계’라는 거죠. 조직화된 사회가 해상권을 지배했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때 일본과 베트남까지 휘어잡았던 해상왕 장보고가 저절로 연상이 되네요. 이 역시 피의 대물림이 아닐까 싶어요.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할 때 하나의 도시국가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며 유물이 쏟아내는 광경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늑도 유적지 발굴에 나섰던 이들도 슐리만처럼 희열의 광소를 쏟아냈겠죠. 늑도 유물만 해도 대한민국 전역에서 모은 유물의 열 배나 됐으니 오죽했을까요. 동아시아 전역의 유물을 통해 청동기 시대에서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기원전 1세기 전후의 우리나라 고대사와 당시의 국제 교역사를 살펴볼 수 있으니, 가치는 정말 천문학적이어서 따져볼 수도 없겠습니다. 아, 세계에서도 유래 없는 우리나라의 온돌난방도 늑도에서 최초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이런 것도 포함해서 말이죠.

찬란했던 늑도의 영화(榮華)는 철기문화의 발달과 항해술의 발전으로 교역의 중심이 낙동강으로 이전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다시 주목받기까지 무려 2천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현재 늑도 유물은 부산대박물관과 동아대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등에 흩어져 있으며 엄청난 유산을 쏟아냈던 발굴지는 개발논리의 상징인 도로에 깔려 흔적조차 없습니다. 발굴을 진행하는 동안 이미 교각이 들어섰다고 하네요. 지금의 그 자리엔 노란 유채꽃들만 피어서 봄을 노래할 뿐입니다. 나중에 박물관이 들어서면 되돌려준다고 했다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박물관 건립은 물 건너 가버렸으니 돌려받기는 요원합니다.

▲ 창선과 늑도를 잇는 연륙교.

곽재구 시인은 오매불망 그리던 늑도에 가기 위해서 배가 뜨기까지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지금은 연륙교 덕에 간단히 갈 수 있는 육지나 다름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관심은 오히려 더 멀어졌습니다. 한국도로공사가 연륙교를 한국의 아름다운 길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다리 그 자체가 주목을 받아버렸고, 늑도의 의미는 그냥 지나쳐버릴 경과지로 전락했습니다. 그저 보물섬 남해로의 길을 잇는 고만고만한 섬일 뿐이네요. 섬 자체가 사적지인데 노상에 제대로 된 이정표 하나 세워두지 않았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일반적으로 애향심의 기저에는 향토사가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지역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인물들이 배출됐는지 살피다보면 없던 애향심도 무럭무럭 샘솟기 마련이죠. 그래서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쉽게 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유산이 숨어 있는 곳, 그 찬란했던 문화, 역사가 벌떡 일어나서 다가오는 것 같은 묘한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늑도입니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한 번쯤 들러서 가슴으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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