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 愛 빠질 만한 이야기 - 10

▲ 늑도에서 바라본 삼천포와 초양도 전경.

책을 읽다가 문득 내 고장의 이야기가 나오면 반가운 마음에 썩 재미있지 않은 글도 자세히 꼼꼼하게 읽게 됩니다. 그런데 실로 멋진 문장으로 직조된 아름다운 글이라면 어떨까요? 자신도 모르게 기억의 서랍에 그 글의 출처를 챙겨놓게 됩니다. 유효기간이 너무 짧아서 언제 부서지고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게 안타까운 뿐이지, 다시 끄집어내는 순간에는 책을 들고 찾아가보게 되겠죠. 늑도로 향하는 발걸음이 씩씩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습니다.

곽재구 시인의 『곽재구의 포구기행』은 포구를 여행하며 느낀 단상을 기록한 책으로 여행이 주는 일탈의 기쁨을 시인의 감성으로 참 멋지게도 아로새겨 놨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섯 번째 여행지는 ‘아, 모두들 따사로이 가난하니-(삼천포 가는 길)’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지만 모두 늑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곽재구 시인이 삼천포를 찾았던 이유가 바로 늑도에 방문하기 위해서였거든요. 시인이 방문했던 때는 연륙교 공사가 한창이지만 완공되진 않아서 늑도까지 가는 방법은 배편이 전부였습니다. 마침내 늑도에 내린 후 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배는 두 시간에 한 대꼴로 운항 중이었다. 밤에 삼천포항에서 건너편 늑도의 불빛을 바라본 추억이 몇 차례 있었다. 이 도시의 해안 언덕바지에 있는 관광호텔의 커피숍에서 바라보았던 늑도의 불빛은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언젠가 저 섬마을에 꼭 가야지 했는데, 오늘 그 뜻을 이룬 것이다.”

▲ 곽재구 시인이 기쁜 마음으로 바라봤던 오백 년 세월의 팽나무.

하지만 시인은 이내 실망을 하고 맙니다. 삼천포쪽에서 바라봤을 때와 실제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고는 “상상의 풍경과 현실의 풍경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 하죠. 그럼에도 “오백 년 어쩌면 그 보다도 더 나이를 먹었을 지도 모를” 팽나무를 발견하고 소소하게 기뻐하다가 청동기 시대의 패총 유적지 발굴 현장에 들르기도 합니다. 곽재구 시인의 이 짧디 짧은 엽편 하나가 늑도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있는 섬. 실제로 늑도에 가보면 그다지 볼 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조사들이야 감성돔 포인트를 찾아서 기꺼이 방문하겠지만, 관광객이 오직 늑도만을 목표로 해야 할 특별한 비경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늑도는 관광이 아니라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있는 섬’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의미이기에 꼭 방문할 가치가 있습니다. 문자의 활용과 기록 여부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하고 청동기는 역사시대에 포함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철기시대부터 문자를 활용해왔으니 우리나라의 청동기는 선사시대라고 해야겠죠. 문자조차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의 흔적이, 그것도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국제무역항의 흔적이 바로 늑도에 남아있습니다.

산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조건이 중요하죠. 산중호걸이라고 하는 산적만 해도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험한 산의 지름길을 목전에 두고 토벌하러 온 관군을 피해 쉽게 도망갈 수 있는 곳에 터를 잡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역 토호나 관에서는 이런 곳을 반드시 확보해야만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있습니다. 교통요충지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면이죠. 바다라고 다르지 않은데요, 산의 조건을 바다로 옮겨놓는다면 영판입니다.

▲ 유채밭으로 변한 늑도 유적터.

누차 강조하지만 한려수도 한 가운데 위치한 사천은 해상과 육상을 연결하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늑도가 관문의 역할을 했는데요, 험한 산길의 역할을 빠른 물살이 대신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물살이 빠른 곳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 빛나는 진도 수역으로 유속이 11노트(시속 20km)이며, 사천 앞바다는 대략 5~6노트로 두 번째입니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물살이 빨랐던 거죠. 그런데 늑도 주변으로 오면 2노트 수준으로 뚝 떨어지는데요, 그러니까 늑도 인근 수역만 확고히 점유한다면 무서울 게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자연환경 등을 감안해서 고고학자들이 조사를 해봤더니, 세상에! 엄청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무려 청동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13,000여 점이나 발굴되었고, 국내 유물만이 아니라 중국계 낙랑토기와 일본계 야요이토기, 진(秦)나라 화폐인 반량전, 한(漢)나라 거울 등이 대량 출토되었던 겁니다. 고고학계는 그야말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선사시대 최대 규모의 유적이 발견된 것만 해도 기절초풍을 할 지경인데, 중국-한국-일본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국제무역의 현장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지천에 널려 있으니까요.

당시 유물 중 부산대박물관으로 옮겨진 분량만 5톤 트럭 10대분이었으며, 전국의 유물을 모두 모아도 늑도 유물의 10분의 1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늑도에서 만난 한 주민의 말을 들어보니 어릴 때는 땅을 파고 노는 재미가 그렇게 좋았다고 하네요. 별 희한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보물찾기 하는 기분이었다는 거죠. 유적 발굴이 끝난 지금도 조금만 땅을 뒤지면 불쑥불쑥 토기가 튀어나온다고 합니다. 온 섬이 유적지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국사시간에 종종 만나고 했던 세형동검의 경우, 부족장과 같은 유력자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늑도에서는 일반 주거지에서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이 몇 달을 고생하며 모은 돈으로 스마트폰을 샀다면, 휴대폰 강국 대한민국에서는 코흘리개 꼬맹이들조차 최신형 스마트폰을 던지고 받는 격이라고 할까요? 아, 놀랍게도 늑도는 동아시아의 물류허브역할을 했던 청동기-철기시대의 도시국가였던 겁니다.

고대 국제무역도시국가였던 늑도에 관한 이야기는…… 죄송하게도 절단마공입니다. 다음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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