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걸어간 길

나는 지금 간이역 벤치에 누웠다. 그녀에게로 데려다 줄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하늘엔 열여섯 개의 태양이 떠 있다. 세상은 매우 환하고 따뜻하다. 그러나 바람이 불진 않는다.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준비 되셨습니까?”

열여섯 개의 불이 켜졌다. 그리고 의사가 물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제 소지품 중에 낡은 사진이 하나 있을 겁니다. 그 사진을 한 번만 볼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한편 꼭 버려야 할, 거추장스러운 것도 있다. 나는 그녀에게로 돌아가기 위하여 꼭 버려야 할 것이 있다.

짙은 포르말린 냄새가 느껴지는 손으로 의사가 사진 한 장을 내게 건네준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지요. 제가 이 세상에서 두 눈을 통해 보게 되는 마지막 사람일 겁니다.”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녀를 잊기 위해 순례했던 낯선 도시에서도 끝내 버리지 못한, 진통제 같은 사진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각막을 제거하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선생께서 기증해 주신 각막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귀중하게 쓸 테지만 말입니다.”

“이제 저에게 눈은 거추장스러운 장기일 뿐입니다. 미련은 없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지 못했지만, 이미 눈으로는 모두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을 만나고 싶습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이 눈을 필요한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습니다.”

꿈을 꾸지 않은 길고 편안한 잠이었다. 누구나 얼마간 가지고 있는 삶의 멀미도 이젠 내 것이 아니다. 세상은 고요하고 또한 여전히 아름답다.

“붕대를 풀겠습니다. 마음의 준비 되셨습니까.”

앳된 목소리를 가진 이 의사는 왜 이토록 자주 ‘준비’에 대해 묻는 것일까. 준비는 이미 오래 전에 끝이 났는데.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란 말씀이시죠?”

붕대를 다 풀 때까지 눈을 감고 있던 내가 묻는다.

“물론입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선생의 각막은 다른 환자에게 완벽하게 이식되었습니다.”

눈을 떴다. 세상이 비어 있다. 빛조차 분간할 수 없는 빽빽한 어둠이 들어차 있다.

“너무나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빛이 느껴지신단 말입니까?”


놀란 의사가 움찔, 내게로 한 걸음 다가선다.

“빛나는 어둠이군요. 너무 눈이 부셔서 선뜻 눈을 뜰 수조차 없을 만큼.”

나는 지금 걷고 있다. 그녀에게로 가고 있다.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약간 불편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벌써 두 번이나 가로수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러나 불편한 것은 곧 익숙해 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 머리와 심장과 두 팔과 다리가 기억하고 있는 아주 익숙한, 바람이 걸어간 길을 더듬어 걷고 있다. 이 길 끝에 그녀가 있다. 이제 단단히 잠긴 문 앞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얼굴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

화상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버린 그녀의 얼굴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됐다.

아마도 우린 남들보다 더 오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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