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룡능선

시대를 풍미했던 배인숙의 노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마주보며 속삭이던 지난날의…….” 그렇습니다. 길은 사색을 끌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며, 과거를 돌이켜 지난 시간을 반성케 합니다.

노폭 50cm에 불과한 산길을 홀로 걸어가다 보면 정말 많은 상념이 떠오릅니다. 평소에 사색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이 기회에 많은 것들을 정리할 수 있겠지만, 저처럼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꼬리를 무는 잡생각으로 정신 사납습니다. 심지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의심까지 들기 시작합니다.

봉수대에서 시작하는 와룡능선 산행은 잡초로 덮여있으나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있는 오솔길 단 하나라서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정표가 자주 보이면 좋겠다 싶은데 많이 귀한 편입니다. 산행이나 장거리 도보여행의 경험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지난 해 3월에 제주 올레길 10코스를 걸어봤는데, 노랑-파랑 리본 등 다양한 표식이 여정을 안내해 주더군요. 갈림길마다 당연히 있고, 지루하게 이어진 길에서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안심하고 따라오라는 뜻이겠죠.

리본 하나에 사람의 온기와 배려가 느껴지는데, 그걸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오솔길 하나로 이어진 와룡능선에서는 필요 없다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초행길인 사람에게 간간히 나타나는 표식 하나가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실제로 너덜지대에서 살짝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고 이때는 정말 아쉬웠습니다. 오죽하면 소방서에서 설치한 구조용 위치안내가 반가울까요.

▲ 구조용 위치안내표지

능선산행은 파형을 그리며 완만하게 상승하는 모양입니다. 적당한 경사의 오르막과 조금 힘이 들면 내리막에 다시 올라가는데, 봉대산을 넘고 무지개샘을 스쳐 봉두산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괴석을 만나게 됩니다. 고인돌 모양의 바위와 우뚝 서있는 바위가 있으니 이게 바로 선바위입니다. 편히 앉아서 선선한 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공간이라 따뜻한 차 한 잔에 숨 돌리면 딱 좋죠. 여기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봉두산(465.1m)의 정상에 서게 됩니다. 앞서 너덜지대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고 했는데, 봉두산 너머에 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었을 너덜지대의 석탑을 보며 저 또한 돌 하나 올리고 손을 모았습니다. 참고로 국립공원지형도에는 이곳이 선바위로 나와 있으니 빨리 수정을 해야겠습니다.

다음 고개는 민재봉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하늘먼당(566m)입니다. 정상에는 군데군데 의자가 있어 식사와 휴식을 취하기 좋습니다. 먼당이라는 말은 꼭대기를 뜻하는 마루의 사투리로, 하늘과 가장 가까이 닿는 하늘마루라는 뜻인 셈입니다. 지척에 민재봉이 있는데 무슨 베짱인지. 중요한 건, 이번 산행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이곳에서 받았다는 겁니다. 이정표를 보니 백천재는 4km, 민재봉은 5.3km로 가야할 길이 더 많이 남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중간에 빠질 길도 없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끝까지 가야하는 겁니다.
동행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이 길은 일요일임에도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봉수대 인근에서 만난 축지법 쓰는 세 분의 산신령 빼고 백천재에 도착할 때까지 한 명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걸음은 갈수록 더뎌집니다. 가뜩이나 체력 달리는 초보가 외로움을 타는데다 기울어가는 해를 보며 용기까지 떨어지네요. 그래도 씩씩하게 걸었으니 봉대산, 봉두산, 하늘먼당, 명지재, 백천재까지 다섯 고개를 넘었습니다. 이정표에 민재봉까지 1.3km 남았는데, 무려 6시간이나 오르내려 지친 몸에는 정말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깔딱고개입니다.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오르고서야 산하를 굽어보게 됐습니다. 저 끄트머리의 봉대산부터 여기까지 걸어왔다니 감격, 또 감격입니다!

와룡산은 하늘에서 보면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누워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높고 낮은 봉우리가 아흔아홉 개로 형성돼 있어 구구연화봉이라고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와룡산이라 함은 봉대산부터 민재봉까지 그리고 천왕봉과 기차바위로 갈라지는 전체 능선의 지칭이겠죠. 이렇게는 돼야 누워있는 용의 모습이며 봉우리도 아흔아홉 개는 될 테니까요. 전설도 재미있는데요, 섣달 그믐날 밤에 산이 운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우리나라 산의 족보격인 산경표(山徑表)에서 와룡산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아흔아홉 골로 하나가 모자라 백 개의 골이 못 되는 산이 되어서 운다는 설, 일제강점기 때 왜구들이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민재봉을 깎아 내려서라는 설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제강점기에 민재봉이 깎여서 그 아픔으로 운다는 생각입니다. 용이 쩨쩨하게 이름표 하나 못 받았다고 울 리 없으며, 골짜기는 백 개보다 아흔아홉 개가 더욱 운치 있습니다. 일제의 과거 만행을 보면 그러고도 남았을 법하고, 실제로 정상에 서고 보니 왠지 그런 기색도 느껴집니다. 전국 팔도 묘혈마다 말뚝을 박고 태실지마저 파헤친 놈들이 뭔 짓을 못했을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산기슭에 살면서도 우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네요. 섣달 그믐날마다 마신 술 때문이겠죠.

▲ 민재봉에서 내려다본 전경

산행은 오르는 즐거움에 멈추고 뒤돌아보는 즐거움이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시원한 바람과 눈을 즐겁게 하는 웅장한 기암괴석 그리고 가슴까지 터지는 조망 정도는 갖춰야 발걸음 멈출 기분이 납니다. 어느 산인들 그런 곳이 없겠습니까만 와룡능선은 거의 모든 길이 이러합니다. 앞뒤좌우로 어느 한 곳 수려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냥 발밑만 바라보지 않으면 됩니다.

저질체력의 보유자가 등산로를 내려오니 산행만 9시간입니다. 전문산악인들도 8시간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집에 와서야 확인했네요. 정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습니다. 그렇지만 완전 초보가 이뤄낸 그 성취감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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