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愛 빠질 만한 이야기-4
문득 이 또한 압축성장의 폐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출퇴근용 옷과 집에서 편히 입을 수 있는 옷이면 충분했던 시대를 살다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사적모임을 가지다보니 자신에게 투자를 못한 겁니다. 면장노릇도 알아야 한다고, 옷을 사 입으려 해도 나이에 맞는 패션 감각을 기를 시간이 없었으니 만만한 게 등산복입니다. 여하튼 이번엔 저도 정말 등산복을 꺼내 입고 길을 나섰습니다. 홈쇼핑으로 구입한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입는 옷이라 좀 어색하긴 해도 산행 시 다른 사람들과의 위화감은 없겠죠. 자, 오늘의 목적지는 와룡능선입니다.
전국의 산악인 또는 등산객들이 언젠간 꼭 한 번 가봐야 할 곳으로 꼽는 곳이 설악의 공룡능선과 지리산 종주라고 합니다. 저 멀리 바다와 운해를 조망하며 능선 따라 산행을 하는 기쁨 그리고 완주했다는 성취감까지 한꺼번에 안겨준다고 하니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은 마음이죠. 문제는 저질체력입니다. 10m마다 숨을 백 번은 몰아쉬어야 하는 저질체력의 소유자들은 평생 발도 못 붙일 것만 같으니…….
그렇다고 포기를 해야 할까요? 바로 여기, 와룡능선을 타시면 됩니다. 바다조망과 능선산행과 암벽등반과 울긋불긋 꽃구경에 기암괴석 바위구경까지 산이 가진 모든 얼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십분 마다 다른 얼굴로 인사를 합니다. 무엇보다 길이 완전 생 초보에게도 힘들다기보다 재미를 안겨줍니다. 공룡능선 대신 와룡능선은 꿩 대신 닭이 아니라 거대한 공룡 대신 깊은 잠에 빠진 와룡입니다.
산의 모습은 들머리를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는데, 문득 붕어빵 먹는 방법이 생각나네요. 맛있는 팥 앙금이 잔뜩 들어간 몸통부터 먹을 수도 있고 즐거움을 남겨두기 위해 꼬리부터 먹기도 하며, 얌체 같이 딱 몸통만 먹고 마는 경우도 있습니다. 산행은 대체로 꼬리부터 먹기 시작해서 가장 마지막에 팥 앙금을 먹는 형식인데, 와룡산은 몸통만 먹는 방법도 있으니…… 정말 고민 많이 했습니다. 가다가 뻗을 수도 있다는 핑계로 와룡산 주봉인 민재봉만 보고 내려오는 얌체산행도 생각도 했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걸로 꽤나 고민한 능선산행은 6코스에 해당합니다.
안점산 봉수대에서 시작해 와룡산 민재봉까지 이어지는 6코스는 용현면 신기마을에서 시작합니다. 약수암에서 30분만 오르면 봉수대가 보이는데요, 이 처음 30분이 너무 힘들어 온갖 잡생각이 다 나네요. 내친걸음이라 무조건 걷고 봤지만, 돌이켜보면 운동부족에 따른 체력미달임을 인정하고 돌아 내려왔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인 중에 800km 여정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이가 있습니다. 결론은 “정말 다녀올 가치가 있다”였지만, 궁금한 건 그 행로겠죠. 떠나기 전에 공부한 결과, ‘체력이 된다면 배낭에 넣고 싶은 걸 다 넣고, 아니면 비우라’였다고 하네요. 자기에게 남는 건 체력밖에 없다며 사색을 담을 수첩과 인터넷 업데이트를 위한 기기, 밤마다 미모를 가꿀 화장품과 특별한 시간을 위한 원피스까지 마구 구겨 넣었다 합니다. 이틀까진 잘 버텼는데, 3일째 되는 날 속옷과 신발만 두고 몽땅 버리고 싶더라는 겁니다.
산행기록을 신나게 쓰다 보니 분량이 넘어버렸네요. 무려 9시간의 대기록인데 대충 정리할 수는 없죠. 따라서 투 비 컨티뉴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