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생의 오솔길]베토벤 교향곡 제 5 번 리뷰

 

▲ 음반 표지 존 엘리엇 가디너 지휘,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 연주. @네이버

Orchestre Revolutionnaire et Romantique
지휘 John Eliot Gardiner

지휘자 가디너는 전공이 역사학이었지만 이제는 현존하는 위대한 지휘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중 5번 교향곡(운명이라고 알려진)을 들으면서 고통과 혼돈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간 위대한 천재 베토벤을 생각해본다.

1악장 Allegro con brio C minor 2/4
운명의 두드림

베토벤 스스로 1악장의 서두에 연주되는 관악과 현악의 유니즌을 두고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라고 표현했다고 전해질 만큼 서주부는 매우 충격적인 동시에 음악을 듣는 우리에게 형언 할 수 없는 묘한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너무나 유명한 이 서주부의 몇 소절 때문에 오히려 이 위대한 음악 전체가 서주부에 매몰된 느낌도 없지 않다. 전체 연주시간이 30분 정도의 교향곡으로서는 비교적 짧은 것이 사실이지만 5번 교향곡을 4악장까지 듣고 있으면 서주부의 충격을 넘는 위대함과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다. 

1악장의 주제가 상승과 하강하면서 그리는 곡선의 정점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반복적으로 겹쳐지는 풍경은 삶의 과정에서 누구나 느끼는 기쁨과 슬픔, 분노와 용서, 사랑과 미움에 대한 음악적 묘사라고 짐작해 본다. 특히 1악장의 중반부(3분 쯤), 정점에서 시작되어 미끄러지듯 연주되는 주제의 변주는 삶의 한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장면을 마치 문자로 표기해 놓은 듯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중반을 넘어서면 고음의 목관악기 독주 부분을 만나게 된다. 살아가는 날들이 우리에게 인내만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여리게 연주되는 이 부분은 살면서 만나는 뜻밖의 여유, 혹은 휴식에 대한 묘사일 수 있다. 비범하거나 또는 평범한 삶에도 햇살은 균등히 비추듯 이 목관의 독주는 그저 감미롭다.

1악장의 후반부는 베토벤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간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치 앞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진군의 나팔소리처럼, 미래의 어떤 시점(구체적인 시점은 없다.)으로 향해가는 듯 한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베토벤음악 전반에서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음악이 정지된 시간의 묘사이거나 혹은 서서히 진행하는 시간성을 가지는 반면 베토벤의 음악에서는 빠른(곡의 빠르기 기호와는 무관한) 시간성을 우리는 느끼게 된다.

2악장 Andante con moto A major 3/8
운명의 실루엣 

서주부가 현악으로 시작되는 것은 운명의 겸허한 수용에서 비롯되는 베토벤적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 음악이 만들어지던 1804년부터 1806년까지 베토벤의 귀는 점점 듣는 기능을 잃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동시에 이웃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빈을 점령한 시기로서 세상도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한 시기였다. 따라서 베토벤은 아마도 1악장에서 표현했던 운명의 두드림을 실제 피부로 느끼며 이 음악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운명과 마주한 베토벤은 스스로 그 운명의 파장을 받아들이듯 부드럽고 느린 현악의 연주로 2악장의 서주부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 베토벤이 사용했던 보청기 @네이버

이어지는 주제(2악장의 주제)는 안정에의 간절한 희망, 제발 이제는 나의 삶이 평안해지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한 일이다. 내게로 다가오는 모든 일들이 나를 흔들리게 하고 또 지치게 하지만 그 외부적인 상황에 맞서 싸우는 것은 어지간한 에너지와 노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수용함으로서 평화와 안정을 찾으려한다. 베토벤 역시 그러했으리라는 추측을 2악장의 느리지만 활기찬 리듬(안단테 콘모토)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평생토록 우리의 삶에 끈질기게 다가오는 분노와 절망과 탄식과 공허의 수용은 얼마나 어려운가? 금관악기(트럼펫, 트럼본, 호른)로 연주하는 부분은 저항의 느낌을 주지만 같은 관악기도 목관악기(파곳, 클라리넷, 피콜로)로 연주하면 수용과 인내의 느낌이 강하다. 2악장 내내 균형을 이루는 이 금관과 목관의 연주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바로 베토벤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견해일 수 있다.

각 악기의 연주 방식에서도 긴 호흡으로 가다가 돌연 짧은 호흡으로 이어지면서 느껴지는 야릇한 억압과 절망의 조각들이 2악장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것은 이미 바흐시대의 엄숙함과 하이든의 정형적 교향곡으로부터 조금은 진보한 음악적 표현으로서 화려하게 피어날 낭만시대를 예고하는 듯 보인다.

그 단적인 예로서 높은음자리표의 현악연주는 완전한 화성과 대위를 통해 통일되고 정제된 음률을 제공하지만 놀랍게도 그 속에는 삶의 긴장과 격정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것은 음악이 가지고 있는 미메시스(Mimesis), 즉 작곡자의 감상과 감정이 음악에 전사되어진 것으로서 베토벤 내부의 탈 고전적 태도와 당시의 사회적 혼란상황이 그대로 베토벤의 정신세계로 녹아들어 음악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베토벤은 고전의 엄숙함을 유지하는 만큼 동시에 고음의 금관악기와 저음의 현악을 활용하여 적극적인 주제의 변주를 시도한다. 이는 운명적 상황에 마주한 그에게서 일어나는 삶에 대한 의문과 스스로 다가서려고 하는 삶의 지평, 그리고 여전히 그에게 존재하는 신을 향한 경외 등을 표현하고 있다.

제 3 악장 Allegro C major 3/4 Scerzo
운명의 격정

1악장 주제의 변주로 시작되는 3악장은 대부분의 소나타 형식의 음악에서 그 곡의 빠르기가 Scherzo인데 빠르고 변덕스럽게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3악장의 전체적인 느낌은 격정이다. 격정이란 강렬하고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라서 누르기 어려운 상태를 말하는데 삶에서의 격정은 삶의 과정에 가끔 나타나는 무지개, 신기루 같은 행운과,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문득 들이닥치는 불행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드물지만 격정은 파멸로 연결되기도 하는 경우가 있어 불행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다. 

바닥에서 서서히 비등하여 마침내 정점에 도달하는 격정의 과정을 묘사한 베토벤의 음악적 표현에서 그의 정신세계는 어쩌면 격정을 넘어선 어떤 숭고함에 도달해 있음을 느끼게 된다. 5번 교향곡을 작곡한 이 시기로부터 그의 음악적 작업은 꽃을 피우게 되는데 (흔히 걸작의 숲이라고 불리는 시기) 이러한 숭고함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돌연 저음의 현악들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갈등, 격정의 감정에 반드시 따라오는 갈등이 저음의 현악으로 묘사되고 수직으로 뻗쳐오르는 고음의 관악은 갈등의 해소 또는 분열의 느낌일 것이다. 2악장에도 등장했던 고음의 관악 독주가 스러지듯 줄어들고 모든 악기가 숨죽여 연주한다. 새소리 바람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처럼 외부의 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우리들 모두가 언제나 느낄 수 있는 내면의 소리 같은 음악을, 관악은 가능한 부드럽게 현악기는 단속적인 피치카토로 주제의 변주를 연주한다. 그러다가 멀리서부터 가늘게 울려오는 소리가 크레셴도 되면서 돌연 4악장으로 연결된다.  

제 4 악장 Allegro C Major 4/4. 
운명을 넘어 

4악장의 처음은 3악장의 끝에서 별다른 구분 없이 크레셴도 된 소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듯이 일제히 연주하는데 이러한 투티는 혼란스러움과 웅장함이 겹쳐 있는 느낌이다. 이내 평온을 회복하지만 이전 악장에서 가졌던 느낌보다는 좀 더 당당해진 평온이며 동시에 결연함 까지 느껴진다.

인간으로서 베토벤이 가졌던 감정과 감각의 모든 장면을 악기의 소리로 변화시켜 연주하게 하는 그의 이 음악적 작업들을 듣고 있노라면 200년의 시간적 차이나 그가 살았던 지역과의 공간적 차이는 이미 우리에게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바로 내 앞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생생하다. 이것은 음악이라는 예술만이 가진 특징이다.

기승전결의 끝을 향해 가는 베토벤의 호흡은 이제 매우 거칠어진다. 투티를 통한 주제의 강조는 마침내 도달해야 할 클라이맥스를 위한 준비로 여겨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토벤 음악의 시간성은 미래 지향적인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피날레 지향적인 음악이다.

같은 주제라 할지라도 동일한 화성과 리듬을 가능한 자제하고 주제의 변주와 확대 또는 증폭을 통해 곡의 피날레로 듣는 사람을 거세게 몰아간다. 이 목적론적 시간개념은 베토벤 음악 전반에 걸쳐 거의 느끼게 되는데, 우리가 베토벤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에너지는 그의 이러한 음악적 표현방법과 무관하지 않다.

거의 청력을 잃어가고 있던 베토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작곡한 4악장의 피날레는 당시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트럼본까지 금관악기에 부가하여 더욱 강렬하고 힘찬 피날레로 종결된다. 음악은 현실성의 반영이라는 루카치의 말처럼 베토벤의 음악은 그가 느꼈던 당시의 모든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고 그 현실은 음표 속에서 그대로 유지되다가 마침내 연주자에 의해 그리고 지휘자에 의해 벅찬 감동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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